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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高句麗史)

tviewone 2022. 9. 7.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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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高句麗史)

 

1. 연구의 흐름과 동향

. 일제 강점기.

- 근대적 방법에 의한 고구려사 연구(다른 연구도 마찬가지)는 일제 시기부터 시작.

-당시삼국사기의 초기기사를 불신. 대부분 삼국지를 기준으로 접근. 후자에 보이는 것만을 고려 대상으로 삼아 활용하는 방법으로 연구.

-결과적으로 삼국사, 고구려사의 내용을 매우 빈곤하게 만듦. 게다가 특정한 분야에만 관심을 집중한 경향성. 이를테면 5() 5() 및 광개토왕비.

*당대 기록인 광개토왕비에 대해서는 특수한 입장.

 

-5족과 5부는 고구려의 공동체적 성격이 강인하였다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수단으로 활용(그를 대부분 씨족 혹은 부족으로 해석해서 국가 발전상의 후진성 강조하는 측면), 광개토왕비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증명해 주는 자료(특히 그 가운데 辛卯年條 기사에만 집중하는 편향성. 이후 오래도록 영향)로 적극 활용함으로써 당대의 사료 이용에서 뚜렷한 한계를 드러냄. 이는 결국 고구려사의 많은 부분을 방기해 버리는 결과를 갖고 옴.

. 해방 후.

-인력이 매우 부족한 상황 속에서도 연구가 착실히 진행되고 그 성과는 꾸준하게 축적. 삼국사기고구려본기를 중심으로 진행. 실증적 접근. 고구려의 국가 형성 및 관료제 운영 연구.

-광개토왕비문에 대해서도 새로운 접근을 시도. 점점 폭이 넓어짐. 특히 1979년 중원(中原)에서 고구려비(高句麗碑, 최근 충주고구려비라고 명명)의 발견은 고구려 연구를 크게 촉발시킨 계기.

-이후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어 연구자의 수도 대폭 늘어나고 다양한 방면을 연구 대상. 중앙정치조직과 지방통치조직, 고분벽화(古墳壁畵) 등이 주된 관심 대상. 다방면에 걸침. 다양한 방법. 문헌사학과 고고학, 미술사학이 결합.

-북한학계에서는 삼국시대를 고구려사 중심으로 접근하여 새로운 체계를 수립하려고 노력. 그 연구 경향과 함께 고고자료가 국내에 소개되면서 더욱 연구를 촉진, 분발하는 계기. 다만 현실의 정치적 정통성의 문제로 왜곡되는 경우가 많음.

  - 2012년 최근 집안(集安)고구려비의 발견. 연구상의 새로운 국면 진입. 

  *광개토왕비의 건립에 대한 신설 제기. 415 1. 장수왕의 시각과 입장에서 정리된 것이므로 광개토왕비문을 새롭게 읽기. 장수왕대에 대한 연구 촉진.

 

. 동북공정(東北工程)과 고구려사 연구.

-근자에 중국이 제기한 동북공정 문제로 고구려사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음. -중국에서는 오래도록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당연시 여김. 중국 자체의 기록을 중시. 전통시대의 중국 사서에서 그렇게 다룬 결과임.

-그런데 70년대 후반부터 일사양용론(一史兩用論)이 제기되기 시작. 중국 동북 지역의 정치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주장.

-그러다가 90년대 전반부터는 국내성(國內城)에 중심지를 둔 시기까지는 중국사의 일부로 보고 지방정권이라 여기다가(발해는 오래 전부터 그런 인식으로 말미암아 한러의 國際論爭化)함 최근에는 그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 고구려사 전체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새로운 입장 구축. 고구려사를 한국사에서 완전히 제외시키는 의도.

-동북공정이 진전되면서 고구려보다 앞서는 고조선 및 부여에 대해서까지도 중국 역사로 다룰 정도로 인식을 확장.

-물론 그런 입장은 아직 중국학계의 주류는 아니며, 현실의 정치성에 강하게 작용한 결과임. 말하자면 중국의 정치 현실과 정책에 부응하여 일부 3류급 연구자들이 동원된 것은 사실.

-기실 중국에서는 역사를 정치의 도구나 시녀로 전락시킨 꼴. 아직 전통시대의 역사관이나 사회주의 역사관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한 잔재이거나 혹은 중국의 거대한 제국으로 탈바꿈하는데 따른 부활. 정치가 연구에 개입되는 매우 위험한 역사 연구 방식.

-주변부에서의 정치적 목적성을 지닌 주장이 확대될 가능성이 강함. 특히 북한의 장래와도 연결된 문제. 북한이 붕괴되면 어떻게 될까?

 

. 대응의 논리.

-종래 고구려사는 한국사로서 당연시되어옴(渤海의 역사와는 다름. 발해사에는 모호한 측면이 내재한 것도 사실. 말갈靺鞨의 문제. 중국사로 보기는 어려움. 또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하여도 전적으로 한국사라고만 단정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음).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처럼 삼국이라는 합칭(合稱)의 표현이 그를 그대로 보여 줌. 중국 기록도 삼국 혹은 삼한이라 통칭. 그래서 그들을 모두 동이전 속에서 함께 다룬 것. 중국사가 아닌 외곽에 배치. 그런 입장에서 볼 때 동북공정의 파장은 큰 충격파.

-국내에서는 그에 대응하기 위해 고구려연구재단과 그 후신으로서 동북아역사재단이 정부 지원으로 설립. 이 또한 여론에 근거한 정치적 대응이어서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

-그 결과로 국내외에서 고구려사와 관련한 연구 업적이 짧은 시간에 매우 많이 생산되고 있으나 수준은 물론 객관성에서는 의문의 요소가 너무 많음. 너무나도 성급하게 서두른 나머지 수량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그와 함께 질적 향상이 동반되었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움. 오히려 혼란스런 측면은 반성의 대상.

 

. 향방.

-사실 민족의 형성 과정 측면에서 엄정하게 살피면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다룰 여지가 충분함. 그래서 일사양용론에는 일견 타당성이 있다고 하겠음. 왜냐하면 고구려는 다종족국가(多種族國家)라는 점에 주요 특징. 그것이 고구려가 발전, 강성하게 되는 힘으로도 작용. 고구려적 천하관(天下觀), 천하의식이 나옴.

-그런데 종족상 혹은 문화계통상으로 보아 고구려의 주류는 한국사로 편입되지만 일부는 중국사 혹은 그 외의 주변 지역으로도 편입되어 감. 그래서 고구려사를 한국사 전유물(專有物)로만 여긴 것은 민족을 형성 과정의 측면에서 제대로 본 것이 아니라 이미 출발점에서부터 존재한 것으로 본 데서 비롯한 잘못.

-중국사에서는 고구려사를 흐름의 주류로 다루기 어렵고 자연히 주변 민족 형성사의 일부로 취급할 수밖에 없는 대상. 다만, 연구사상의 문제는 주변 민족사로 다루지 않고 현재처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본다는 점에 있음. 이 또한 현실의 정치적 중화민족주의(中華民族主義, 전통적인 중화민족 우월주의의 소산. 근자에 중화의 개념이 달라짐)에 입각하여 이미 민족이 만들어져 있었다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한 것.

*중화주의, 화이관적 사고의 성행.

 

-동북공정은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였다는 점에서 일정하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음. 적극 대응한다면 이제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를 바라보는 접근도 시도해 봄 직함. 그를 통하여 한국고대사를 새롭게 체계화 시도. 참신한 그림이 그려질지도 모름.

-중국사에서도 고구려사를 부분적으로 다루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변지역사일 따름. 변방사의 일부이기 때문에 주류는 되지 못함. 반면 한국사의 입장에서는 주류사(主流史)이기 때문에 고구려사는 결국 한국고대사로 귀결되게 마련.

-그러므로 너무 성급하게, 그리고 현실 정치적외교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경계하고 자제해야 마땅함. 역사전쟁(歷史戰爭)이니 어쩌니 하는 군사적 용어도 사용 금지. 어디까지나 조용한 분위기에서 학술적으로 연구를 진행, 성과를 집적, 질적인 수준 향상 도모. 이것이 장래의 향방을 결정하는 주된 요소. 과학적, 체계적으로 고구려사를 서술하는 쪽이 곧 그 주인공이 됨.

 

2. 약사

. 쟁점(爭點).

-고구려사 관련 문헌은 빈약. 삼국사기고구려본기가 중심이며, 3세기 이전의 초기사(初期史)에 대해서는 삼국지 동이전의 고구려조가 참조.

-그 외에 무척 다행스런 것은 고분벽화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 이는 고구려사를 생생하게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 특히 안악 3호분(이른바 佟壽墓, 357) 5세기 초의 덕흥리의 벽화고분 및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 그리고 광개토왕비와 충주고구려비, 집안고구려비 등 금석문은 중요한 기본 자료. 이들이 고구려사 연구의 중심적 역할. 그밖에 많은 고고자료가 동원.

-연구를 통하여 큰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중앙의 지배구조에서 정치운영, 지방통치, 지방 5()의 실재 여하 및 군현제 시행 여부와 시기(3단계 조직과 4단계 조직), 초기의 왕계 및 왕실 교대. 안악 3호분 피장자 주인공, 태왕릉(太王陵) 및 장군총(將軍塚)의 주인공, 평양 경영, 고구려의 천하관(天下觀, 太王號), 후기의 연개소문(淵蓋蘇文) 정권의 성격 문제 등.

 

. 시기 구분.

-고구려는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건국. 이후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정치 사회의 발전과 쇠퇴의 과정을 거쳤음. 고구려사의 체계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시기를 나누어 보아야 함.

-대체로 전후의 3시기로 나눔이 통설. 시기 구분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음. 이를테면 천도[졸본, 국내성(丸都), 평양성] 등 수도의 위치를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음. 천도 자체가 내부 정치와 외부 상황의 결과란 인식. 이에 대해서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음. 그 자체가 사실이기 때문. 다만 내부의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 데에 한계.

-가장 일반적으로는 읍락국가(연맹), 부체제(6대 태조왕 이후 - 3세기 말 烽上王代까지), 중앙집권적 귀족국가(4세기 초 미천왕 이후).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는 다시 귀족연합기(미천왕-고국원왕), 왕권강화기(소수림왕-문자왕), 귀족연립기(안원왕 이후)로 설정 가능. 귀족연립기는 다시 전기와 후기로 구분. 후기는 연개소문의 집정기로서 파행의 시기인 셈.

 

. 고구려사의 기본적 특징.

- 다종족(多種族) 국가로서 다양성이 큰 바탕. 경제적 기반은 농경과 목축. 지역과 종족에 따라 경제적 기반에 차이. 지리적으로 중국이나 북방의 선진지역 및 강적과 접근. 자연히 성장 발전 과정에서 그들과 교류 교섭하고 때로는 투쟁이 불가피. 따라서 강인강건한 모습. 군사적 지배체제. 기병, 군사적인 지방지배 특히 성() 중심의 운영. 무기 및 전술 전략. 정치 운영에서도 그런 점이 나타남. 벽화 속의 풍속도(風俗圖)에서도 그런 측면. 백제 및 신라에 정치 문화적 큰 영향. 오래도록 방파제로서 역할. 매우 불리한 측면. 멸망 요인.

 

3. 형성과 전개

. 기원전 1세기 이전의 압록강 유역.

-압록강 중류 유역에는 요령식동검문화(遼寧式銅劍文化)와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가 복합적으로 나타남. 동쪽과 서쪽의 차이 나는 두 문화가 만나는 접점 지역. 이를 고조선계와 부여계 문화의 접합이 이루어진 지역으로 추정. 두 계통의 주민이 잡거(雜居) 혼융(混融)하는 양상. 기존의 청동기 문화에 서기전3-2세기 한()의 철기문화가 유입되면서 생산력이 향상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정치 세력이 성장하며, 재편이 이루어졌을 듯. 문헌상의 뚜렷한 증거는 두 가지.

-예군남여(濊君南閭)의 존재. 서기전 128 28만구()를 거느리고 요동군(遼東郡)에 내속(內屬). ()은 이곳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여 위만에 대한 압력을 가하는 전초기지로 활용하려 함. 남려의 근거지는 압록강 일대와 그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渾江) 일대로 비정되고 있음. 이들은 고구려 세력의 일부로서 그 성장을 보여 주는 사례.

-()의 현도군이 압록강 중류역 일대에 두어졌을 때 치소가 바로 고구려현(낙랑이 조선의 정치적 중심지에 두어졌듯이 고구려현이 곧 이 지역 예맥족의 정치적 중심지라 하여 이상할 바가 전혀 없음).

 

. 국명

-고구려의 구려(勾麗) 삼국지에 따르면 고구려말로 성()을 뜻한다는 구루(溝婁, 을 지칭)와 같은 단어. 그렇다면 고() 높다’, 또는 크다는 의미로서 여러 성 가운데 중심지를 의미할 듯. 다수의 구려(, 고을이란 말도 관련)가 있었고 그 중 고구려는 정치적인 중심지. 이는 여러 성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인 구려의 연맹체가 이미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

-그것이 국가사회의 발전에 따라 점차 국명으로 정착. 평양이나 나라가 보통명사였다가 고유명사화하는 것과 마찬가지.

  *8세기 중엽 세워진 돌궐비에 백크리, 맥크리.( 의 구려란 뜻)

 

. 압록강의 적석총.

-그 지역에서 특정 정치체가 성장 도중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물증이 바로 무기단식작석총(無基壇式積石塚). 이 지역에서 적석총은 3단계 과정을 거쳐 발전. 이 적석총의 기원이나 출현 시점 등을 둘러싸고 논란. 대체로 요동지역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보나 자생설(自生說)도 있음. 조성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3세기 무렵. 유물의 양은 빈약하지만 이 지역 일대 정치세력의 존재를 상정할 만하며 문헌과 일치되는 부분임.

-요컨대 소위 주몽계의 고구려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압록강 중류 일대에는 상당한 세력 기반을 가진 정치체가 존재. 고구려로 불림. 다만 이 고구려는 정치적 중심지라는 보통명사로 사용되었을 뿐 아직 국명은 아닌 듯.

 

. 고구려 성립 전야(前夜)와 주몽(朱蒙) 등장

-기원전 75년 압록강 중류역의 정치세력을 대상으로 두어진 현토군이 이동하였다는 것은 곧 그 지역 토착사회의 반발을 받았음을 의미. 고구려가 현토군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성장일로. 그 세력의 실체를 풀어가는 실마리는 주몽(朱蒙)의 건국설화. 주몽은 위기를 피하여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3인을 이끌고 도망. 마침내 도달한 지역은 졸본부여(卒本夫餘)라 불림(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沸流谷忽本이며 그 서쪽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 이곳이 五女山城일 듯).

-그곳에는 이미 부여족 일파가 세력을 형성한 상태. 주몽은 남하하면서 모둔곡(毛屯谷)에서 유력자 3인을 만남. 이들은 이 지역 정치세력. 이들을 결속, 규합하여 보다 큰 세력 형성. 주몽은 이미 선주(先住)한 다양한 세력을 포섭하여 성장. 특히 졸본부여라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정치세력이 존재한 곳에서 세력 확장한 것. 이는 주목되는 사실. 유이민이 기존의 토착세력과 결합하여 성장한 사례.

-삼국사기백제본기에 의하면 이미 부여계의 졸본부여가 있었는데 그 왕이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둘째 딸을 주몽의 부인으로 삼게 함. 졸본부여왕이 사망하자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기록(백제본기의 본문. 거기에서 비류와 온조가 탄생. 고구려본기에도 그와 비슷한 기록이 夾註로 보임).

-졸본부여인 연타발(延跎勃)의 딸인 소서노(召西奴)가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으나 우태가 사망. 졸본으로 돌아와 있는데 주몽이 와서 결합하였다는 것. 소서노 덕분으로 왕위 계승하게 되었다고 함(백제본기의 夾註). 주몽 집단의 성장에 혼인 등이(왕비족?) 유효한 수단으로 작용하였음을 추정케 함.

-어떤 기록을 따르더라도 주몽은 정복전쟁을 통한 것이 아니라 기존 세력을 활용, 상당한 기간이 경과한 후 유력 세력으로 부상. 다만 그 기반은 주몽이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고[처음에는 보통명사로 출발하였으나 주몽이 동명왕(東明王)으로 등장한 후 고유명사화한 것으로 봄이 일반적. 그러나 그 역순(逆順)도 가능할 듯], 또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다룰 줄 아는 능력을 가졌음으로 미루어 발달한 선진 기술력의 소유자. 성장의 바탕은 새로운 문물이었을 듯.

주몽은 초기에 ‘(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이라 한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미약한 세력. 점차 주변세력을 복속시키면서 성장. 그런데 그보다 큰 규모의 상당한 정치세력이 함께 비류수를 끼고서 존재한 상태. 비류국(沸流國)의 송양왕(松讓王). 주몽이 나타나자 송양왕은 我累世爲王 地小不足容兩主 君立都日淺 爲我附庸可乎라 하여 굴복을 강요하나 주몽은 쟁투하여 송양왕을 굴복시킴. 이처럼 주몽이 등장하기 이전에 비류국이 이미 존재. 누세(累世)에 걸쳐 왕 노릇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현토군이 쫓겨난 것은 바로 비류국을 중심으로 한 여러 정치세력이 반발한 결과로 보임.

-비류국은 단순한 읍락국가가 아닌 듯. 송양왕이 주몽에게 양보한 것은 연맹장의 지위. 그가 물러난 이듬해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이라 한 데서 알 수가 있음.

 

- 주몽은 송양 대신 비류수 유역 일대에 존재한 정치연맹체의 맹주 지위를 차지. 그런 사정을 보여 주는 것이 삼국지 王之宗族 其大加蓋稱古鄒加 涓()奴部本 國主 今雖不爲王 嫡統大人 得稱古鄒加 亦得立宗廟 祠靈星社稷 絶奴部世與王婚 加古鄒之號라 한 기록. 계루부 이전에 이미 소노부가 고구려의 왕 노릇.

-그 시점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으나 다수설은 주몽의 등장 때로 봄. 이는 주몽 이전에 고구려의 존재를 의미하며 곧 송양(소노와 같은 뜻)이 주몽에게 패배한 사실을 의미함. 주몽의 고구려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연맹체 세력이 존재하고 따라서 먼저 주몽은 맹주가 되었던 셈.

-비류국(뒷날의 소노)이 맹주가 된 것은 한의 군현인 현토와 싸우면서였던 듯. 그에 대항하기 위하여 주변세력을 결집하면서 연맹이 형성되고 그 맹주가 된 듯. 이미 그 이전에도 정치세력이 존재. 그렇다면 기원전 1세기 초 이전 단계, 이후 비류국 맹주의 연맹 단계, 다음의 주몽 단계. 이처럼 세 단계를 거친 것(이를 那國聯盟體라고 함. 그 구성 단위는 나국(那國)으로 읍락국가임. 이들은 물가에 위치하여 나()를 칭하였으므로 그렇게 불림).

*고구려의 유국(有國) 기간에 대해서는 3가지 설(700, 800, 900년설). 일반적으로는 700년설이지만 이는 주몽의 건국 기준을 삼은 것으로 각기 나름의 의미를 가짐. 바로 위의 세 단계와 일치하는 셈(이를 주몽의 그것과 구분하여 原高句麗라 부르는 견해도 있음).

**북한에서는 최근 고구려의 건국 기년을 집안(集安)에 있는 오도령구문(五道嶺溝門)의 적석총 등을 근거로 기원전 277년으로 봄. 그러나 그 근거는 불분명.

 

. 성장과 발전의 과정

-주몽이 압록강 유역에 출현하기 이전 그곳에는 다양한 세력이 존재. 특히 졸본부여라 칭하듯이 부여계 선주민도 있음. 중국측에서는 흔히 동이의 한 일파로 북쪽 지역에 거주한 주민을 맥()이라 부름. 그 구체적 실체는 불명. 예족(濊族)의 일파인지 아니면 그와 분리되는 것인지 뚜렷하지가 않음. 대체로 예맥(濊貊)이라 한 것으로 보아 예족 가운데 한 일파가 맥족인 듯. 현토군이 이맥(夷貊)에 의해 밀려났다고 함. 한서왕망전에는 고구려후(高句麗侯) ()를 맥 혹은 예맥이라 칭함. 삼국지에서는 확실히 고구려를 맥()이라 표현. 그 이후 고구려는 흔히 그렇게 불림.

-주몽의 출발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여러 가지 설. 북부여설, 동부여설(두만강 유역 출자설), 부여설. 이 가운데 부여 혹은 북부여설이 정당할 듯(고구려의 금석문 및 중국 측 기록에는 그렇게 되어 있음. 우리 측 기록에는 동부여와 함께 북부여도 나오지만 전자가 다수. 그러나 동부여는 부여가 3세기 말 모용씨 세력에 쫓겨 두만강가로 옮긴 뒤 생겨난 칭호이므로 타당하지가 않음). 다만 부여의 정치적 중심지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부여의 변경지역일 가능성이 높음.

-주몽이 맹주가 된 이후 주변 세력의 통합(賜姓 등의 방법으로 편입). 말갈을 물리치고 행인국(荇人國), 북옥저(北沃沮) 복속. 아마도 맹주가 된 후 기존의 졸본부여를 버리고 고구려라는 국호를 칭하기 시작한 듯(6세기 무렵 고구려는 고려(高麗)로 국호를 고침). 다만, 성을 이때 고()란 성씨를 칭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 처음에는 차라리 부여계라는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해()라고 칭한 듯.

-이로써 고구려는 사실 정치적 중심세력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였다가 주몽을 맹주로 하는 연맹체의 국호로 채택(마치 마한 진한과 비슷한 칭호. 그런 측면에서 졸본을 계루(桂婁)로 바꾸었을지도 모름). 그 다음의 유리왕(琉璃王) 22(기원후 3)에는 국내성으로 천도(尉那巖城). 아마도 현도와의 관계가 문제였을 듯. 그래서 군사요충지로서 방어하기에 유리한 곳을 선택.

- 이후 주변의 나() 혹은 나국(那國) 세력을 복속 혹은 병합하면서 성장. 나부(那部)가 출현함. 5개의 나국이 연합하여 하나의 정치세력화한 것이 5나부(那部)체제. 대체로 태조왕 20(72) ‘春二月 遣貫那部沛者達賈 伐朱那 虜其王’, 22(74) ‘冬十月 王遣桓那沛者薛儒 伐朱那 虜其王子乙音爲古鄒加 한 것이 그 하한.

-따라서 고구려의 5나부연맹체(那部聯盟體)가 갖추어지는 것은 논란이 많지만 대체로 태조왕대(太祖王代)로 봄이 일반적. 태조왕은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불리는데 왕명에서도 느껴지듯이 이전과는 다른 국가체제를 갖춘 결과를 그렇게 표현, 마치 고구려의 중시조(中始祖)와 같은 존재. 주몽이 사실 계루국의 왕으로서 고구려라는 연맹체의 연맹장에 불과하였다면 태조왕대(太祖王代)는 한 단계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소위 부체제 아래의 국왕인 셈. 두 체제 사이에는 격차가 뚜렷.

*읍락-읍락국가-읍락국가연맹(송양과 주몽단계) - 부체제(태조왕)-중앙집권적 귀족국가(4세기 초반의 미천왕대 이후. 한편 그 내부는 다시 구분)를 거침.

 

-그런데 문제점의 하나는 주몽은 고()씨라 칭하고 있으나 그 아들인 유리왕 이후 태무신왕(大武神王), 민중왕(閔中王), 모본왕(慕本王)은 해()씨라 칭함. 반면 6대 태조왕은 고씨라 칭하고 있는 점. 이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진행. 같은 이를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계가 달라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당시 성씨를 후대처럼 그렇게 인식할 필요는 없을 듯. 무언가 태조왕의 즉위 후에 나타난 국가체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음.

-주몽은 정상적이라면 해씨. 천제(天帝)의 아들인 해모수(解慕漱,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와 물의 신인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의 사이에 출생. 아버지의 성을 따랐다면 당연히 해(태양)가 되어야 함. 그런데 그는 고구려라 칭하면서 거기에서 를 성으로 하였다는데 그렇다면 그의 아들인 유리 이하는 고씨가 되어야 하나 해씨라 되어 있음. 태조왕의 아버지는 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 재사(再思)이므로 당연히 해씨이어야 함.

-이로 보면 태조는 유리왕의 방계로 뒤에 그와 구별하기 위하여 다른 성씨 사용하였을 가능성. 유리왕에게는 3인의 부인. 원래 다물후(多勿侯, 소노부계) 송양의 딸을 비로 맞았으나 일찍 사망하여 다시 골천인(鶻川人)의 딸 화희(禾姬)와 한인(漢人)인 치희(雉姬) 두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임. 갈등 관계. 태조왕의 모후(母后, 再思의 부인)는 부여인으로 되어 있음. 아마도 태조는 방계. 5대인 모본왕이 모본인(慕本人) 출신의 두로(杜魯)에게 시해 당함. 그리하여 즉위 후 그 전과는 계통이 다르다는 천명(闡明)으로 성을 씨로 함. 거기에는 자신들이 기존의 부여계와도 다른(이미 선진인 부여를 계승하였다는 인식을 내세울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나아가 부여를 복속시키기도 한 상태) 고구려 중심세력이라는 정체성 표방. 새로운 고구려의 출방을 선언. 사실상 이때부터 고씨를 성으로 삼고 새로운 의미를 내재한 국호로서 고구려를 사용. 주몽의 경우 당대에 고씨라 하였다기보다는 태조왕대의 추존 가능성. 아니면 는 단지 위대하다는 의미로만 사용된 듯. 혹시 고는 활을 잘 쏜다는 주몽의 앞에 붙어 가장 잘 쏜다는 형용사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을 지도 모름. 그것이 마치 성인 듯이 인식되고 태조왕대에 그를 따라 개성(改姓)한 것?

 

. (5)부체제의 전개.

-태조왕대 고구려 지배집단의 핵심인 5나부가 성립. 이들 5부는 적석총 조영집단으로서의 공통성을 가짐(특히 기단식적석총 조영). 공동된 문화기반을 오래도록 공유. 그 중심은 역시 계루부(桂樓部).

-이밖에 비류나(沸流那, 消奴), 연나(椽那, 絶奴), 관나(貫那, 灌奴), 환나(桓那, 順奴). ()는 노(), (), ()과 마찬가지로 토지 혹은 물가의 땅이라는 뜻. 계루(桂樓)는 성()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가 없음. 이는 계루부가 배타적인 특권 집단임을 의도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거주지역의 여건이나 환경 혹은 그 본래적 기반이 다른데서 온 차이로 보는 것이 옳을 듯(특히 다른 나부와는 달리 지배집단 구성이 다양하다는 것이 큰 특징). 마치 아크로풀리스와 같은 것. 다른 집단은 계곡의 이래에 만들어진 땅(扇狀地 지역)을 의미하는 ()에 거주. 계루는 구려(溝婁)와 마찬가지로 이나 높은 곳으로 가리키는가.

- 5나부(那部)는 원래 그 각기 읍락국가의 규모라는 데에 특징. 읍락국가는 다수의 읍락으로 구성되며 그 중심이 국읍. 이 점은 신라의 6()와는 근본적인 차이. 신라의 6부는 각각이 사로국을 구성한 읍락들. 말하자면 신라의 6부는 전부 합쳐야 하나의 나부(那部)에 해당. 규모에서 엄청난 차이. 지배세력의 범위가 다름. 이것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가 발전이나 성격의 차이를 갖고 옴(그래서 부체제는 고구려형과 신라형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필요). 관등제 신분제 관료제 지방제의 운영에도 큰 차이 초래.

-나부(那部)는 반자치적(半自治的) 단체(외교권, 교역권 없음). 다만 독자적으로 관원(다원적인 형태임)과 군사력 보유. 그러면서 계루부의 통제를 받는 조직체. 이원적 지배구조인 셈. 점차 자치권에 대해 제약이 가해짐. 계루부는 전체를 통할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일원적인 지배에는 한계.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에로의 과도기. 그래서 부체제(나부통치체제)라 부름. 다만 이를 집권국가(集權國家)로 보는 견해도 소수 있음. 나부의 내부에는 각기 3-4개의 소단위 조직이 존재. 이를 부내부(部內部)라 부르는 견해도 있음. 읍락의 후신들일 듯. 나부는 점차 통제를 받아 감. 관원을 국가에 보고하여 허락받아야 하는 단계에 이름.

-국가의 중대한 일은 각 부장(部長)을 중심으로 여러 대가(大加)들이 참여하는 제가평의회(諸加評議會)에서 결정. 물론 국왕의 권한이 가장 컸지만 각 부의 견해도 무시할 수 없음. 견제 대상. 국왕은 절대권을 갖지 못한 상태. 그래서 특정한 부의 여성과 혼인. 왕비족설(王妃族說). 상당한 기간 동안 절노부(絶奴部)가 그런 역할. 이를 통하여 다른 부를 견제. 대신 다른 유력한 특히 소노부의 대가에게는 3세기까지도 고추가(古鄒加)라는 하는 칭호를 주어서 각별히 우대하고 나아가 따로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제사하는 권한을 부여할 정도.

-그러나 점차 국왕권의 나부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 나부세력은 따로 중앙관등인 패자(沛者)나 혹은 우태(優台) 등을 지급받음으로써 독자성을 상실하고 관료화의 길(아마도 관나부나 순노부 등이 약화되어 3부가 중심인 단계 및 나머지 2부가 소멸되는 단계 등 점진적인 과정). 마침내 중앙의 관등으로 일원화됨. 관등과 관직의 분화, 그러면서 거주지를 중앙으로 옮겨 나부명이 소멸. 이들은 왕기(王畿)가 되고 왕경은 방위명(方位名)을 부명(部名)으로 바뀜. 왕도의 행정구획화.

-지방에 대해 왕명을 대행하는 지방관이 파견되어 종래의 간접지배를 벗어나 직접지배로 전환(교통로 군사 요지의 성을 중시하는 정책). 이로써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 탄생, 부에 대신하여 그 아래의 가계(家門)가 중시되는 단계. 신분제 성립. 귀족의 탄생. 공지공민(公地公民, 王土王民)의식이 정착되어 귀족들의 자의적 수탈 방지. 왕위도 형제상속에서 점차 부자상속으로 바뀌어 왕위계승권이 정착. 대체로 4세기 초반.

-일원적인 관등제가 성립되면서 사자계(使者系)와 형계(兄系)로 정리. 관등제의 근간이 됨. 고구려의 경우 백제나 신라에 비하여 관등제가 미발달한 특징. ?

 

4.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전개와 멸망

. 중앙집권화와 그 전개.

-3세기 말 4세기 초에 집권체제가 성립되었으나 아직 초보적 수준. 부체제적인 단계를 확연히 벗어난 상태는 아님. 그런 형편에서 342년 선비족(鮮卑族)인 모용황의 공격을 받아 왕도인 국내성이 함락되는 국가적인 위기를 겪음. 대외적인 위기는 결국 내부의 체제 정비를 갖고 온 계기와 명분.

-소수림왕(小獸林王)대에 이르러 위기를 극복. 율령 반포, 불교 수용, 태학(太學) 설립. 비로소 집권체제에 걸맞은 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짐.

-그런 측면에서 그 이전까지는 귀족연합적 성격으로 보아 그 이후 단계와 구별. 소수림왕대 이후 특히 광개토왕, 장수왕, 문자왕(文咨王)대는 국왕 중심의 집권화가 크게 진전되어 이른바 전제왕권의 시대라 일컬음. 지배체제가 상대적 안정. 영역의 확장 성공. 그것이 다시 왕권 강화에 기여. 고구려의 전성기 구가. 427년 남쪽 평양으로의 천도는 그를 강력하게 실현하는 바탕. 귀족의 기반에 대한 약화 정책.

 

. 귀족의 대립과 갈등.

-문자왕 사망 이후 고구려는 왕위를 둘러싼 외척의 준동. 장수왕의 지나친 장기집권과 관련. 왕위 계승상의 혼동 야기. 손자계승으로 이어지면서 복잡. 거기에 왕의 외척이 간여하면서 다툼이 장기간 전개.

*장수왕의 장수가 왕위 계승에 끼친 영향.

 

-문자왕의 아들인 안장왕(安臧王)이 피살되고 그를 이은 인원왕(安原王)도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의 두 외척이 싸움. 그 결과 양원왕(陽原王)이 즉위하면서 새로운 시대 돌입하니 이를 귀족연립의 시대라 일컬음.

-최고위직으로 귀족회의의 의장격인 3년 임기의 대대로(大對盧)를 귀족들이 스스로 결정. 새로운 귀족가문이 성장하는 환경(淵蓋蘇文도 그 일원).

*乙支文德, 王山岳, 溫達

 

. 멸망과 그 요인.

-이제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 전개. 고구려는 그를 해결해야 하는 숙제. 그런 과정에서 중국에 통일왕조 수()와 당()의 등장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변동을 크게 유발하는 요인으로 작용.

-고구려는 내부적인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잘 견디어 내었으나 지나친 전쟁 일변도의 경직된 외교정책은 멸망으로 이끈 결정적 요인이 됨. 그 위에 지배세력의 내분.

-연개소문은 사망 당시 분열 양상을 우려. 세 아들에게 당부하는 모습. 국내 정정의 극심한 불안. 왕권파와의 갈등. 연씨 집안 내부에서도 반발할 정도.

-다른 한편 국제정세에 어두웠을 쁀 아니라 백제와의 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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