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1750-1850
요지 : 18-19세기 유럽을 관통하는 3가지 키워드는 산업혁명으로 강력해진 ‘열강’과 프랑스혁명으로 생겨난 ‘민족주의’라는 개념, 그리고 나폴레옹시대 이후 유럽의 균형을 추구하고자 메테르니히가 주장한 ‘유럽협력체제’이다.
산업혁명의 원인-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시작된 이유로는 농업혁명, 인구폭발, 기술발명, 기업적 환경, 자본유입, 좋은 사회기반시설 등을 들 수 있다. 농업혁명은 토지개간, 가축사육의 발전, 인클로저운동, 4모작의 도입(노퍽지방)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4모작의 도입은 곡물생산량을 2배로 끌어올렸고 이는 다른 유럽대륙에 비해 영국인들의 영양상태를 좋게 만들었다. 그에 따라 질병에 대한 저항력의 증가, 수입의 증가, 소비재의 수요에 대한 증가 등의 효과가 뒤따랐다. 기술발명에 있어서는 다축방적기(하그리브스), 동력 직기(라이트), 뮬 정방기계 등의 기계들이 대량생산될 만큼 충분히 질긴 면직을 생산하였고 실크나 리넨과 충분히 경쟁할 수 있는 부드러운 질의 면직도 생산하면서 면직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은 주철보다 우월한 연철의 개발을 이루었고 그 후 이렇게 개선된 철을 이용하여 철도가 개설될 수 있었다. 즉, 운송수단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산업발달은 자본과 기업가정신을 필요로 했는데 당시 영국은 이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인도에서 독점적인 열강이 된 영국은 귀중한 금속을 풍부하게 제공받았고 연방들과 더불어 투자할 자본이 풍족했다. 이 투자는 은행업무와 신용거래의 전체적인 구조를 바꾸었다. 1800년대에 들어 모든 소도시에까지 은행이 들어섰다. 또한 영국은 지도력이 있었다. 유럽대륙과는 달리 영국의 귀족들은 무역, 상업, 부동산관리를 중히 여겼고 입헌군주제 하의 의회체제라는 정치체제가 자유로운 경제와 산업의 발전을 도왔다.
산업혁명의 효과-두 가지의 사회적 효과와 한 가지의 경제적 효과 그리고 한 가지의 정치적 효과를 낳았다. 첫 번째 사회적 효과는 도시의 성장이었다. 주거와 위생에 있어 수많은 문제들을 보이면서 공장을 중심으로 무절제한 방식의 도시 확장이 일어났다. 그 결과로 도시계획을 시작해야했고 주택, 도로, 교통수단, 가로수, 수도, 하수시설에 투입할 돈을 충당하기 위해 지방정부의 권한을 수용해야했다. 두 번째 사회적 효과는 이주였다. 유럽 안에서 이주는 세 가지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각각 공장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한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주, 일자리를 찾기 위해 가난한 국가에서 부유한 국가로의 이주,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서 그 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으로의 이주의 형태로 나타났다. 경제적 효과는 산업의 팽창이 교역의 국내장벽에 도전한 것이었는데 이는 독일에서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당시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매우 후진성을 띄었다. 독일은 국내교역을 방해하고 밀수를 부추기는 다양한 관세율과 비용이 드는 관세행정을 하는 작고 많은 주들이 있었고 이러한 주들이 다른 주에 속하거나 심지어 독립된 소유지를 서로의 영토 속에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은 영국에서 몰려드는 값싼 상품을 막지도 못했고 독일을 둘러싸고 있는 국가들의 높은 관세에 대항하지도 못했다. 또한 도로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으며 운하와 강의 교통수단도 적당하지 않았다. 이러한 난관들을 타개하기 위해 프로이센의 주도로 독일관세동맹이 체결되었다. 관세 동맹의 결과로 같은 독일 연방 내에서도 프로이센과 관세동맹 내의 주들은 오스트리아와는 다른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다른 경제적 이해관계를 갖게 됨으로써 중부 유럽에서 둘의 경쟁 관계는 깊어져 갔다. 또한 관세 동맹은 독일의 여러 주들의 경제적 근대화에 기여하였으며 독일통일을 위한 기초와 동력을 제공했다. 정치적 효과는 계급에 근거한 정치세력들(자유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성장이었다.
프랑스혁명-프랑스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프랑스가 미국독립전쟁에 개입한 후 프랑스가 파산에 이르렀고 정부의 신용도도 폭락했던 데에 있었다. 프랑스정부는 파산한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귀족들과 성직자들에게 주어진 재정적 특혜인 면세특권을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그 조치에 반대했고 진정한 국민의회만이 그 문제를 승인할 수 있다고 간주했다. 이에 따라 삼부회가 소집되었고 투표가 머릿수 표결로 진행되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겁을 먹은 귀족들의 압력을 받은 루이16세는 의회를 해산하려고 했다. 의회는 파리민중의 지원을 구했고 1789년 7월 14일에 민중들은 전제왕권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감옥을 함락시켰다. 이 사건은 프랑스 도처에서 농민봉기를 자극했다. 봉건제도는 폐지되었고 소작농들은 봉건적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가치에 중점을 두고 인권선언은 법 앞에 평등과 직업의 선택에 있어서의 평등을 선포했다. 교회의 토지는 압수되었고 매각되었으며 교회는 면세특권을 상실했다. 프랑스혁명은 ‘인간은 완벽할 수 있다’라는 계몽주의 사상에 그 기원을 두었고 신 없이도 이성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이 창조될 수 있다고 했다. 불완전한 인간을 강압하는 전제적인 통치자를 요구하는 사회와 달리 과학적 지식은 사회에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가는 수단을 제공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성과 자유의지는 인간의 본성을 재생시키고 사회를 개혁하기에 충분했다. 1791년 9월에 새로운 헌법이 선언되었고 새로운 입법부의 구성을 위한 선가가 열렸다. 의회의 목적은 입헌군주정을 만드는 것으로 그것을 전복시키는 것은 아니었으나 국민의회의 마지막 조치 중 하나로 새 의회에서 그들 자신의 회원자격을 스스로 부정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온건파가 제거되었다. 새 의회는 훨씬 더 공화주의적인 성향을 가졌다. 많은 귀족들이 해외로 달아났고 프랑스를 폭도의 통치하에 있는 신을 믿지 않는 사회라고 하며 외국정부들이 전쟁을 일으키도록 촉구했다. 그들의 요구는 오스트리아의 황제와 프로이센의 국왕이 다른 국왕들과 더불어 루이16세를 복위시킬 준비가 되어있다고 선언했을 때 관철되는 것처럼 보였다. 외침과 구제도의 부활에 대한 두려움과 내적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은 프랑스정부가 1792년 4월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만들었다. 한편 경제적 파국과 함께 프랑스에서는 타국의 침입위협이 의회에서 의원그룹들 사이의 파벌싸움으로 연결되었다. 지롱드파는 프랑스를 위해 지방분권화구조를 원했던 공화주의자들로 구성되었고 파리의 민중들과 결합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자코뱅파는 통일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정부시스템을 추구하는 열광적인 공화주의자들이었다. 1792년 9월에 공화국이 선포되었지만 정부는 곧 혁명재판소와 공화안전위원회를 통한 자코뱅파통치의 독재로 전락했다. 2년 동안 공포정치가 있었고 귀족들과 성직자, 왕과 여왕, 마침내 지롱드파까지도 처형되었다. 공포정치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고 자코뱅파를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된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종식되었다. 1794년 7월에 자코뱅파의 지도자가 권좌에서 쫓겨났고 즉시 처형되었다. 이에 이어 프랑스는 양원으로 구성되는 의회의 수장인 5명으로 구성되는 위원회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외부로부터의 압박, 다른 한편으로는 내부에서 다시 살아나는 왕정주의자들과 자코뱅파의 잔류들은 군부에 대해 지나치게 의존하게 만들었다. 침략에 직면하여 혁명적인 프랑스정부는 처음으로 징병제를 포함한 국가총동원령으로 대응했다. 혁명프랑스군은 북쪽에서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군을 패퇴시켰고 오스트리아의 네덜란드령(벨기에) 그리고 홀란드는 프랑스에 넘어갔다. 남쪽에서는 오스트리아통치하의 이탈리아가 나폴레옹에게 위협받고 있었다. 스위스 역시 점령당했고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나폴레옹의 등장과 유럽사회의 변화-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제1통령에 올랐고 그 다음에는 1804년에 자신을 프랑스황제로 선언하고 왕위에 올랐다. 프랑스자체는 행정적, 사회적 그리고 교육적 개혁을 통해 강화되었으며 이러한 개혁들 중 많은 것은 프랑스국가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시대의 25년 동안 프랑스는 근본적으로 변했다. 왕권신수설을 통한 군주제가 끝났다.(이는 영국의 명예혁명으로부터 150년 뒤의 일이다.) 귀족들은 교회, 국가나 군대에서의 고위직 독점권, 그들의 봉건적인 권리, 재판권과 세습적 특권들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다시 돌아온 망명귀족들이 자신들의 땅을 보전했고 나폴레옹은 체제의 지지자들에게 작위를 주어 귀족들을 늘려나갔으며 그 작위들은 나폴레옹정권이 붕괴되고 난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1815년 이후 확대된 귀족들은 상당한 재산을 가졌고 사업에 개방적인 자세를 가졌다. 나폴레옹은 종교를 사회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세력으로 인식했다. 1801년에 그는 교황과 조약을 맺었는데 그 조약에는 가톨릭주의가 대부분의 프랑스사람들의 종교로 인정되었으며 따라서 가톨릭의 활동에 대한 장애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국교로서 가톨릭주의의 문서화는 공화주의자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농민들을 토지에 긴박시켰던 봉건적인 의무들은 사라졌다. 많은 농민들이 교회와 망명귀족들로부터 몰수한 땅을 구입할 수 있었다. 농부들은 새로운 사회적 신분을 얻었고 이때부터 농촌프랑스의 보수주의의 근간이 되는 경제적 안정의 수단(토지)를 획득했다. 시대역행적인 길드, 노동이동에 대한 제한과 내국세 같은 무역과 산업에 부과된 장애는 제거되었고 사회적 이동성의 수용과 더불어 중간계급은 1815년 이후 산업혁명이 프랑스에 도래했을 때 혜택을 보았다. 프랑스는 중앙집권을 통해 통합되었다. 나폴레옹에 의해 창조된 개인의 재능에 기초한 승진과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경력을 가진 공무원들로 구성된 새로운 행정계급은 프랑스를 민법전에 근거하여 운영되도록 만들었다. 민법전은 개인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 시민결혼, 이혼의 권리를 보장했으며 사유재산을 보장했다. 교육적인 중앙집권은 고등학교(리세)시스템을 통해 달성되었다. 이것들로 인해 프랑스는 통일성과 중앙집권의 나라로서 각인되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힘은 그 자체의 보편적 가치의 요구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프랑스혁명은 그러한 요구들과 충돌되는 근대민족주의를 탄생시켰다. 전쟁을 통해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동원되었을 때인 국가총동원령 이후 프랑스국민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로서 자각하게 되었다. 프랑스혁명과 제국은 왕실에 대한 충성에서 주권을 부여받은 하나의 민족이라 불리는 국민에 대한 충성으로의 변화를 유도했으며 민족은 국가와 동일시되었다. 혁명직전까지는 프랑스인구의 30퍼센트는 여전히 갖가지 방언을 구사했다. 하지만 새로운 프랑스는 다양한 방언을 무시하는 하나의 문화를 채택했다. 혁명기와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단일한 분리불가한 민족’에 위협으로 간주된 지방의 언어와 문화들을 박멸하고자 했으며 이런 입장은 20세기의 마지막 몇 십년간에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저지대국가들,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도는 다시 그려졌고 벨기에는 합병되었다. 나폴레옹에 대항하기 위해 대불동맹이 결성되었지만 나폴레옹은 이들을 차례차례 격파한다. 프랑스혁명군은 갔던 곳마다 혁명의 가치와 원리를 그곳에 이식시켰다. 봉건주의는 전복되었으며 귀족들의 특권은 종식되었다. 프랑스의 민법전이 도입되었고 권리의 평등권이 유대인과 종교적 소수자들에게도 주어졌다. 교회와 영주의 재판권은 소멸되었으며 근대법원과 배심원제도가 도입되었다. 저렴하고 보다 효율적인 행정이 봉건적인 과거로부터 잔존해온 경쟁적이고 중첩적인 수많은 행정기관들을 대체했다. 봉건제도와 특권들이 없어지면서 모든 직종들이 능력을 갖춘 사람들에게 개방되었으며 국내시장들은 내국관세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이 모든 것들은 무역을 확장시키고 중간계급을 위한 기회를 만드는 데 연계되었다. 프랑스의 군대들은 새롭게 해방된 곳에서 프랑스정부의 법과 제도를 강요해서는 안됐으나 상황은 국왕들에 대항하는 전쟁이 아니라 이들 국왕을 지지하였던 사람들과 그들 나라의 전통적인 제도들에 대한 전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것은 프랑스제도들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전쟁을 의미했다. 사람들은 해방되어야 한다고 강요받았다. 특히 혐오되었던 것은 영국을 패배시키기 위한 나폴레옹의 시도로부터 비롯된 무역의 왜곡이었다. 윌리엄3세 이후 전통적인 영국의 외교정책은 힘의 균형을 보장하는 것이었고 어느 한 나라가 대륙을 지배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으며 잉글랜드로의 침략이 가장 용이하게 시도될 수 있는 저지대국가에서 어떠한 열강도 거점을 마련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의 사건전개에 대한 영국의 적개심은 프랑스가 18세기에 자유주의의 모범사례로 영국을 주목하였다면 이제는 영국을 세계반동의 수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1805년 프랑스군대를 잉글랜드로 보내기 위해 영불해협의 통제권을 획득하려는 희망은 넬슨의 승리로 좌절되었다. 영국의 해군은 프랑스와 그 동맹국이 속해있는 해안의 봉쇄를 시작했고 나폴레옹은 프랑스와 그 동맹국영역의 모든 항구에서 영국의 취항과 화물을 차단하는 대륙봉쇄령으로 보복했다. 이에 영국은 영국선박들을 거부하는 항구를 이용하는 모든 중립국의 해운을 금지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대응했다. 그 결과는 민족주의의 반발이었지만 다른 종류의 민족주의였다. 프랑스, 그 이전에 영국의 민족주의는 독재적인 정부로부터 개인의 권리에 대해 맞선 투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유럽곳곳에서의 민족주의는 프랑스의 문화적 가치들에 대한 반대뿐만 아니라 함축적으로 집단성이 천명되었다하더라도 보다 큰 집단의 권리들에 대항하는 개인의 권리들에 대한 주창과 더불어 외세지배에 대항한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민족주의는 중간계급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으며 따라서 미래지향적인 것이었다. 중간계급이 주도권을 쥐지도 못하고 정부에서 경력을 쌓지도 못한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동유럽에서 발생된 민족주의는 과거를 주목했으며 민족주의가 18세기의 낭만주의운동과 연계된 독일만큼 두드러진 곳은 없었다. 독일의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와 대립하는 삶과 자연 그리고 역사의 해석이었다. 이것은 이성보다는 감성과 감정에 기인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몰락은 대륙봉쇄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스페인에 대한 내정간섭은 스페인민족주의자들의 저항을 초래했다.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프랑스는 차차 스페인에서 발을 빼야했다. 그 후에 러시아는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자 대륙봉쇄령에 참가하기를 그만두려 하였고 나폴레옹은 유례없는 대군을 일으켜 러시아를 정벌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군사력에 크나큰 타격을 입는다. 이 패배는 유럽도처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을 고무했다. 1813년 10월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웨덴은 자신들의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러시아편에 가담하여 프랑스에 타격을 주었다. 6달 후에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하고 나폴레옹은 퇴위했다. 루이18세의 즉위로 부르봉왕조가 재건되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나폴레옹은 빈에서 연합국들이 경쟁하는 때를 틈타 복귀를 시도했다. 하지만 영국과 네덜란드의 군대에 패배하고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1821년에 그곳에서 최후를 맞는다. 25년간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출생의 충격적인 감소를 겪어야했다.
메테르니히의 유럽협력체제-이후 1815년에서 1848년까지 유럽정치의 핵심적인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수상인 메테르니히였다. 그는 오스트리아제국이 결속력이 약한 국가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의 수장으로 황제를 인식하는 단순히 지역들을 합쳐놓은 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민족주의에 특히 취약했으며 만약 제국 내의 민족들이 독립하게 된다면 오스트리아는 존속할 수 없었다. 메테르니히는 또 다른 위협을 간파했는데 만약에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룬다면 오스트리아는 빈회의에서 획득한 영토를 상실할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는 이탈리아라는 열강과 독일의 부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산업적·군사적 힘이 유럽본토에서는 최강인 하나의 독일민족국가, 즉 프로이센에 의해 주도되는 하나의 독일 사이에 갇히게 될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오스트리아를 붕괴시키고 이탈리아와 독일을 통일시키는 민족주의를 억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만약 프랑스혁명의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재발하고 승리를 거둔다면 그들이 새로 생겨나게 될 민주주의국가에서 그들의 왕권과 특권을 완전히 상실할 것이라는 점에서 독일과 이탈리아 제후국의 통치자들뿐만 아니라 러시아 차르의 두려움을 십분 활용하여 민족주의를 억압할 수 있었다. 프랑스혁명으로 야기된 국내적 또는 국제적인 차원의 파괴에 두려움을 느꼈던 메테르니히는 사회 안에서 적절한 균형을 통해 질서를 확립하고자했다. 그는 각 나라 내부에는 균형이 존재하고 따라서 각 국가는 파괴적인 힘에 맞서 기존의 사회질서를 지켜야한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나라들 사이에 균형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는데 만약 한 국가가 질서를 유지하려면 국가들은 자체의 대비책에 의존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며 국제적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하며 그 국제사회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일원이 되어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메테르니히는 힘의 균형을 믿었고 국가들의 정치적 힘은 완전히 분할되어서 어떤 단일 열강에 의한 침략은 위험한 도박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만약 일부 국가들이 세력을 확장하든지 혹은 어떤 한 나라가 취약해져서 힘의 공백이 나타난다면 유럽에서의 힘의 균형은 무너질 것이었다. 메테르니히의 생각은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그리고 프로이센으로 구성된 5개의 기독교열강이 유럽 내에 평화를 위협할만한 특이한 사건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유럽이 함께 협력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메테르니히는 또한 다섯 열강들이 만약 정치적 안정성이 자유주의나 민족주의에 의해 위협받는다면 다른 나라들의 문제에 개입하는 권리를 가지길 원했다. 그의 생각은 신성동맹이라고 하는 전제군주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지지받았다. 하지만 입헌군주국이었던 영국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프랑스는 혁명의 성과들이 유지된다는 조건으로 복구된 부르봉왕조를 수용하였다. 영국은 개입정책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프랑스군대가 스페인으로 가서 반동적인 군주국을 복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과 오스트리아군대가 피에몬테와 나폴리로 가서 그곳에서의 자유주의운동을 짓밟도록 하는 결정에 항의하였다. 그리고 영국은 제임스 먼로가 그의 독트린을 통해 아메리카에서의 봉기진압을 위한 유럽열강들의 개입을 경고하였던 미대통령 제임스 먼로를 지지하면서 새로운 라틴아메리카국가들을 인정하였다. 1821년 그리스인들이 오스만터키제국에 봉기를 일으키자 메테르니히는 터키인들이 봉기를 진압하도록 방치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이 실제로 진압당할 것처럼 보이자 그리스를 동조하는 정서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까지 확산되었다. 1827년에 영국-프랑스-러시아연합함대는 나바리노 만에서 터키의 함대를 격침했고 몇 년 뒤에 그리스는 독립했다. 이 사건들은 메테르니히의 원칙에 큰 타격을 주었다. 열강들 사이에 균일이 생겼고 민족주의가 승리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또 가톨릭의 벨기에가 네덜란드와 개신교가 지배적이던 네덜란드연방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유럽열강들의 지도가 바뀌었다. 유럽협력체제는 서서히 해체되었으며 산업혁명이 열강들의 정치적·경제적 힘에서의 차이를 가속화시켰듯이 열강들 사이의 경쟁을 격화시켰다.
영국과 대륙-영국의 해군력은 다른 열강들의 해군력보다 강했다. 영국은 최대의 식민제국이었으며 막강한 재정적 입지는 해외로의 투자와 자본을 쉽게 제공했다. 영국은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했는데 이 것은 독일에서는 1900년, 프랑스에서는 1920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의 경험은 영국적인 사회·경제적 기풍이 대륙의 기풍과는 현저하게 달랐다는 것을 확고하게 했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되었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영국에서 국가의 역할은 투자와 자본의 유통을 자극하는 차치하더라도 혁명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해가 지나면서 이는 정부가 경쟁적인 그룹과 이해의 공평한 중재자로서 관망해야하며 관망을 포기하고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보수적인 전망’으로 가다듬어지게 된다. 이는 곧 사회는 그 사회가 원하는 바대로 발전하며 더 이상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까지 이전의 전통과 선례를 활용하면서 그것에 의존하여 사회는 자발적으로 새로운 전례와 전통을 만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대륙에서는 프랑스혁명의 유제는 국가의 역할이 단지 공동체가 선호하는 한계 내에서 안정과 질서뿐만 아니라 국민들이 바라는 목적, 일반적으로 성문화된 헌법에 명시된 목적 혹은 이상을 성취하고자 하는 도구였다. 프랑스와 독일은 미미한 중간계급이 있었고 영국에 비해 자본이 열악했기 때문에 산업화와 특히 철도제도의 발전을 지원한 것은 국가였다. 이러한 차이는 20세기 마지막 몇 십년간 유럽통합의 과정에 대한 영국의 거부감에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