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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新羅史) 골품제

tviewone 2022. 9. 7. 22:35

신라사(新羅史)

 

1 . 연구 동향

-가장 많은 자료. 고대사 연구의 중심으로 주도. 새로운 큰 자료의 출현이 추동.

-비중이 가장 큼. 그러나 다른 분야에 비해 지원이 가장 적음. 최근 신진 연구자가 매우 적음.

 

2. 신라사 시기구분(時期區分)

. 시기 구분의 필요성.

-신라 1천년의 역사도 정체되었던 상태로 머물렀던 것이 아니므로 전 시기를 같은 선상에 놓고 파악할 수는 없음. 따라서 그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기를 나누어서 이해할 필요. 시대구분.

 

. 당대(當代)의 시기 구분

- 왕호(王號)에 의한 시기 구분;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삼국사기󰡕삼국유사󰡕).

- 매금(寐錦)과 매금왕(寐錦王), 대왕(大王, 울주천전리서석). 이는 초기사(初期史)에 대한 설명으로는 유효하나 전체 신라사를 다 담아내기는 미흡. 한정적으로만 사용되고 있음.

- 삼대법(三代法) ; 상대(上代), 중대(中代), 하대(下代). 󰡔삼국사기󰡕12 신라본기(新羅本紀) 경순왕(敬順王) 9년조의 말미(末尾).

*삼대목(三代目, 眞聖女王 2年條)

 

- 삼고법(三古法) ; 상고(上古), 중고(中古), 하고(下古)의 구분.

󰡔삼국유사󰡕1 왕력(王曆) 제이십이지증왕조(第二十二智訂麻立干條).

- 위의 양자에 중복하는 부분이 중대와 하고. 모두 56왕 가운데 28왕으로 나뉨. 그 까닭으로 왕통계보(王統系譜)의 조작설 제기.

 

. 삼대법과 삼고법을 아울러서 정리하면 상고, 중고, 중대, 하대로 4(). 그 가운데 비교적 기간이 긴 상고는 다시 왕호를 기준으로 마립간시대와 그 이전으로 구분. 또 이는 국호를 기준으로 사로시대와 신라시대로 구분되기도 하므로 양분하는 것이 타당. 따라서 신라사는 전체를 5시기 구분.

 

. 1(赫居世-訖解尼師今)는 사로국(斯盧國)시기(邑落國家시대, 三韓시대),

2(奈勿麻立干-智證王)는 부체제(部體制)시기(聯盟王國),

3(法興王-眞德女王)는 귀족연합(貴族聯合) 시기(中央集權的 貴族國家),

4기는 (太宗武烈王-惠恭王)는 전제왕권(專制王權)의 시기,

5기는(宣德王-敬順王) 귀족연립(貴族聯立)의 시대.

 

2. 󰡔삼국사기󰡕 초기기록(신라본기)의 신빙성 문제

. 신라사 연구의 가장 큰 장애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신빙성 문제. 도입부의 혼란. 종래 이를 둘러싸고 크게 논란.

*일본 식민주의사학과 초기기록.

 

. 논란의 주된 근거는 󰡔삼국사기󰡕의 초기기사가 중국 측의 󰡔삼국지󰡕와 크게 차이를 보인다는 데 있음.

-3세기 초  중엽 경 󰡔삼국사기󰡕는 사로국에 의해 낙동강 이동 지역이 거의 대부분 통합된 반면 󰡔삼국지󰡕는 진한의 12국으로 분립된 상태로 묘사.

-그밖에 사료 자체 내부에 상호 모순되거나 상식을 뛰어 넘는 문제. 고고학 성과와의 불일치 등.

 

. 이처럼 양자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란. 여기에는 역사적인 사실 뿐만 아니라, 기년(紀年), 삼성교립(三姓交立)을 포함하여 초기의 왕통계보 문제까지 결부되어 있음.

-크게 부정론(否定論), 긍정론(肯定論), 수정론(修正論)(王統은 신뢰하되 기년은 조정, 다만 방식은 논자에 따라 다름)의 세 견해로 나뉨. 그 가운데 수정론이 통설. 다만 이도 한결같지는 않음.

 

 

3. 신라국가의 형성 과정

1)신라(사로국) 건국기의 세력 구성

. 신라의 모태는 경주에 위치한 사로국. 이런 국가가 성립되기 이전 구석기, 신석기인이 경주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있음. 청동기인의 거주는 확실. 지석묘, 토광목관묘의 존재. 늦어도 기원전 1세기 초 무렵에는 정치세력화.

. 사로의 건국기에는 그를 구성한 세력은 다양. 그 가운데 박(), (), ()으로 대표되는 세력. 이들의 경주지역 이주하여 정착한 시기는 선후. 그들의 본래 근거지나 성격을 둘러싸고는 많은 논란. 그밖에 많은 세력이 존재.

. 6촌장(村長) 세력(朝鮮遺民으로 표현된 세력. 삼국유사에서는 이들도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세력들로 묘사. 그에 앞선 선주민(先住民)들의 존재도 상정 가능.

-이들이 바로 경주 일원에 산재하는 支石墓 조성 집단들일 가능성이 높음), 진한계(辰韓系), 변한계(弁韓系), 중국계(中國系)(이들은 ,  계통), 왜계(倭系)(瓠公), 낙랑계(樂浪系).

. 이처럼 다양한 세력이 사로의 구성원. 그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집단이 바로 박(), (), () 3 세력. 이들은 각기 사로의 읍락을 구성. 다른 집단들은 대체로 그들의 하위(下位)에 편성. 이들만이 사로국의 수장인 니사금(尼師今)의 지위 계승. 서로 배타적인 혼인 관계.

 

2) , , 김의 출자(出自)와 세력 기반

. , ,  3 집단으로 구성된 세 읍락이 중심이 되어 연맹 형성. 3성교립은 그를 반영. 이들은 경주 이주 시기와 기반에는 뚜렷한 차이.

. 박씨를 외래계와 토착계로 보는 두 견해로 나누임. 건국신화로 미루어 보아 이른 시기에 토착화한 세력은 아닌 듯. 적어도 6촌장의 뒤. 6촌장이 고조선계 유민이라 하면 이들에 의해 순순하게 받아들여진 박씨도 또 다른 조선계일 듯. 그들이 경주에 진입하기 직전 근거지를 상주(尙州, 沙伐國)로 보는 견해. 어떻든 6촌장계보다는 발달한 청동기와 철기문화를 보유한 집단이었을 듯.

. 석씨가 외래계라는 데 대해서는 이론이 없으나 그 계통에 대해서는 논란. 해양(海洋)계와 흉노(匈奴). 경주에 진입하기 전에 울산(蔚山) 방면에 거주. 甘浦 방면으로 보는 설도 있음. 철기에 기반하며(와 세, 쇠의 발음) 해양활동을 한 세력.

-비슷한 기반을 가진 금관국(金官國)의 수로(首露)와 대결. 같은 해양계였을 왜계의 호공(瓠公)과 경쟁하여 제압. 울산에서 경주 이주 후 토함산을 배경. 발달한 철기문화 소유. 그를 바탕으로 선주(先住)한 박씨 집단과 제휴하면서 제압해 감.

. 김씨의 출자에 대해서는 최근 큰 논란. 과거 김씨를 가장 선주한 6촌장계와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강하였음(蘇伐公). 그러나 최근 소백산 일대로 보는 설(예천 문경 영주지역), 4세기의 기마유목민족의 일파로 보는 설(부여계?), 대구(大邱)로 보는 설 등의 신설.

. 신라 지배집단(김씨)의 유래를 중국측 문헌 기록에는 다른 내용.

-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에는 진인(秦人). 진한(秦韓). 이는 󰡔삼국지󰡕의 영향일 듯.

- 󰡔수서(隋書)󰡕 󰡔북사(北史)󰡕 󰡔통전(通典)󰡕에는 魏將毌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留者遂爲新羅라 하여 고구려인에 의한 건국으로 봄.

- 그리고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傳祚至金眞平(中略)其先附庸於百濟(中略)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

- 󰡔구당서(舊唐書)󰡕에는 新羅國 本弁韓之苗裔也

 

3) 김씨족단 성장의 정치경제적 배경

. 가장 후발주자였던 씨는 씨에 앞서 먼저 씨와 연결. 이는 알영(閼英)설화에 반영(은 아기, 알이기도 하고, 이기도 함). 다만 이 때 김씨는 경주에 근거지를 가진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 거주(아마도 大邱 혹은 慶山?).

-그 뒤 경주로 진입(閼智 脫解대에 출현). 이들이 초기에는 약세. 점차 성장하여 가장 유력하였던 석씨를 제압해 감.

. 김씨의 성장 기반은 미추왕(味鄒王)의 아버지 구도(仇道)의 활발한 군사적 성공. 이미 철()의 소유와 제작은 일반화. 따라서 김씨 성장의 경제적인 배경은 다른 곳. 무엇보다도 금은(金銀)에 대한 독특한 기능을 보유한 집단.

-그들이 그 자체를 훗날 성씨()로 사용한 점, 신화 속의 금궤(金櫃), ()의 뜻, 고고학적인 증거. 금은을 기반으로 고구려와 연결. 선진 무기, 무구, 마구 등 기술 수용. 고구려와 밀착.

. 금은의 채굴과 세공 기술을 어떻게 소유한 것인 지는 수수께끼.

- 신라의 금은세공기술을 락랑 멸망과 관련짓는 견해가 있음. 아마도 크게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한 구도(仇道)가 활동한 지역이 소백산맥 일대로 낙랑지역에서 경주 방면으로 나아가는 교통로상에 위치하여 낙랑 소멸 이후 발생한 유이민 포섭 가능. 그들을 다수 확보하여 금은광을 개발.

- 경주에서 금은은 4세기 중엽부터 출현(경주 월성로 가-13). 그 전의 삼한에서는 옥()을 재보로 중히 여김. ()이 주요 기반. 김씨가 금은을 어디서 어떻게 채광한 지는 명확하게는 판단할 수가 없음

- 의성(義城)일 가능성. 의성은 소문국(召文國). 소문은 금()이란 뜻. 연개소문(淵蓋蘇文). 금성(金城).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 적석목곽분 중심지 가운데 하나.

. 김씨의 또 다른 특징은 닭과 관련되는 세력. 그것은 국명을 계림(鷄林)이라 한 데에서 짐작되는 사실.

-신화 속에 흰 닭의 존재. 국호를 계림(鷄林). 시림(始林).

-이 닭의 실재를 보여 주는 것이 바로 6부 가운데 핵심인 (. 발음은 달, 탁이라 하지만 닭이 본음, 훼라 발음하는 견해도 있으나 잘못). 소위 닭 토템 집단. 󰡔계림유사(鷄林類事)󰡕, 천마총(天馬塚)의 달걀. 이 탁()이 신라의 모태(母胎)가 된 것은 분명.

. 달구벌(達句伐)로의 천도. 달구벌(달성, 달벌성)과 월성(月城)은 동일한 유래. 모두 닭에서 온 것. 왜 달구벌로의 천도를 시도하였는가. 훗날 통일기 신라의 중사(中祀)의 대상인 오악(五岳) 가운데 공산이 부악(父岳). 경산(慶山)이 압독(押督). 이 독()이 탁(, )이라면 대구 경산 지역이 경주와 밀접한 관련.

-혹시 김씨의 출자(出自)가 대구 혹은 경산 지역이 아닌가. 고려해 볼 필요. 그 까닭으로 천도 시도?.

 

4) 김씨세력의 지향

. 김씨는 3성 집단 중 가장 뒤늦게 경주에 진입하였으나 최후의 승리자가 됨. 승자가 되면서 신라 혹은 계림을 사로와 병행 사용. 이들은 단순히 이칭으로 사용 시간의 선후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재(內在)된 의미 자체에 차이.

. 사로는 경주를 지칭. , , 김을 포괄하는 국호. 반면 계림은 사실상 김씨 집단의 국호. 그들 중심의 편협성(偏狹性)과 함께 지향성, 구심력(求心力)을 보여 주는 국호.

-신라는 경주 뿐만 아니라 영역화한 전체 지역()을 포괄하는 국호. 지방을 범주에 넣은 광의의 국호. 이처럼 3개의 다른 성격의 지향이 공존. 그러나 사로는 6세기 초부터 사용이 거의 중단되나 계림과 신라는 오래도록 병용됨. 고려시대 이후에도 시인묵객들이 사용.

. 이는 신라 지배 집단의 양면성을 보여 주는 것임.

-하나는 신라라는 국호에서 느껴지듯이 포용성(원심력). 다른 하나는 씨 중심에서 느껴지듯이 배타성(구심력). 신라의 지배체제의 안정기에는 양자 균형. 그러나 균형이 무너질 때 문제가 발생. 그것이 신라의 모순구조. 그를 보여 주는 것이 경위(京位)와 외위(外位) 2원적인 관등제 운영과 골품제.

4. 신라의 성립과 전개

1)4세기 신라의 성립

. 진한연맹체는 어느 시기부터 사로를 맹주. 그러나 이는 경제적 관계를 중심으로 한 미약한 정치적 관계. 그를 구성한 각 소국(小國)이 독자적인 기반을 갖고 연맹체에 참여.

-사로국을 정점으로 하는 정치적인 상하관계를 가진 것은 아님. 사로국이 가장 유력하였을 따름. 다만 교역이나 교류상의 대표성을 사로가 가짐(지리적인 교통상의 利點). 일종의 연합체적인 성격에서 출발하여 3세기 무렵부터 한층 강한 연맹관계 성립.

 

. 󰡔진서(晉書)󰡕 동이전(東夷傳)에서는 진한이란 이름으로 수차례 중국 본토와 통교. 그 중심세력이 곧 사로일 것으로 추정.

-이때부터 낙랑(樂浪)(帶方) 중심의 교역(交易)을 벗어나려는 시도. 이는 구야국(狗邪國, 金官國) 중심의 변한(弁韓)이 낙랑을 중심으로 한 교역망을 선점한 데 대한 반발.

 

. 그 즈음 4세기 초 북방 5()세력의 中原 진출로 진()이 남천(南遷)하는 변동(316). 그와 연동하여 한반도 방면에서는 고구려가 남하. 313, 4년 낙랑과 대방(帶方)의 멸망. 이로 말미암아 유이민 파동이 일어나 소백산맥을 넘음.

-한강 유역에는 강한 세력인 백제(伯濟)가 장악했던 까닭에 유이민은 직하(直下)하지 못하고 그를 우회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진한과 변한(弁韓)지역으로 진입. 진한과 변한에 파동 야기. 정치적인 통합운동. 아마도 이 때 기존의 느슨한 관계를 청산하고 정치적으로 뚜렷한 상하관계를 가지는 질서로 전화. 그러나 아직은 명확한 상하관계를 형성하기 이전. 신라(사로)연맹체라 불러 둠.

 

. 이로써 기존의 낙랑 중심 교역체계는 완전히 붕괴. 금관국 중심의 변한연맹체는 그러한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여 쇠퇴의 길.

-반면 사로국 중심의 진한연맹체는 새로운 변화에 적극 대처.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질서에 참여. 철과 해상교통 중심에서 이제 육상교통과 금은을 중요한 매개 고리로 한 체계로 전환. 신라가 정치적인 통합을 달성한 뒤 급성장할 수가 있었던 바탕이 됨.

 

. 이와 같은 정치적 통합에 의한 새로운 교역체계 위에 신라란 새로운 왕조가 성립. 그를 보여 주는 증거가 씨 중심체제의 성립(國邑의 패권 이동이면서 동시에 각 읍락의 해체와 그에 대신하는 3부체제의 성립).

- 마립간이란 왕호 사용 및 신라란 국호의 출현, 금은의 사용, 고총고분(高塚古墳)의 출현(*積石木槨墳과 지방의 竪穴式石室墳), 신라식토기의 성립(가야토기와 분리. 瓦質土器 古式, 新式陶質土器).

 

. 그를 방증하여 주는 외교관계가 신라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중국 통교한 사실. 󰡔삼국사기󰡕3 나물니사금(奈勿尼師今) 26년조(381, 󰡔太平御覽󰡕 所引秦書에는 382) 遣衛頭入符秦貢方物 符堅問衛頭曰 卿海東之事與古不同 何耶 答曰 亦猶中國 時代 變革 名號改易今焉得同”.

 

. 이제 새로운 마립간시대. 마립간과 니사금시대는 뚜렷한 차이. 이후에도 이사금이란 칭호가 소멸된 것이 아니라 존속. 사로국의 지배자가 이사금, 신라에 어울리는 칭호가 마립간.

-양자는 병존. 두 용어의 차이에 따른 체제의 차이가 존재. 사로 중심체제가 이사금이라면 신라 중심체제는 마립간.

 

2)신라의 영역 확장과 발전

.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으로 중국과 통교. 내적인 성장, 비약적인 발전. 한편 그와 함께 영토를 확장하여 가야 및 이 지역으로 진출하여 오는 백제와 대립하는 형세.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에 걸쳐 복잡한 국제 관계. 국제외교(교역관계가 정치외교로)가 중시되는 시기로 전환.

 

. 369년 백제의 가야 진출(加羅  7)과 마한(馬韓) 병합. 백제 가야의 새로운 관계와 임나(任那)의 성립. 371년 고구려와의 싸움 승리.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사망. 고구려의 재정비와 소수림왕(小獸林王)의 개혁.

-이후 신라도 고구려 세력을 배경으로(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하자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어 결속. 고구려는 신라를 속민(屬民)으로 간주- 광개토왕비(廣開土王陵碑)의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 영역 확장하여 낙동강 동안(東岸) 유역을 완전 장악(比子㶱 복속). 가야 및 백제와 대립되는 양상.

-이에 백제는 고구려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는 한편 가야에 진출하는 신라를 제압하기 위하여 왜()에 병력 요청. 고구려-신라, 백제-가야-왜의 연합전선이 형성.

 

. 그러한 긴장관계는 396년 고구려가 백제를 제압하면서 정리. 광개토왕비에 의하면 백제 아신왕(阿莘王) 남녀 생구(生口) 1천명과 세포천필(細布千匹)을 바쳐 항복하고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함.

-그러나 백제의 사주를 받은 가야와 의 연합세력이 399년 신라 왕성(王城)을 공격하여 신라는 위기. 고구려에 원병 요청. 광개토왕의 남정(南征)과 낙동강 유역 진출. 왜의 패퇴(敗退).

 

. 고구려의 구원에 의한 위기 극복으로 이후 신라 영토에 고구려의 군사가 주둔할 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간여하기 시작. 401년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실성(實聖)을 귀국시켜 나물왕의 자식이 있었음에도 즉위. 눌지(訥祗)의 즉위에도 간여.

-군사 주둔 기간이나 범위에 대해서는 논란. 종래 왕도에 한정하고 그 기간도 433년 나제동맹(羅濟同盟)까지로 잡았으나, 󰡔일본서기󰡕14 웅략기(雄略紀) 8년조(464)에는 이때부터로,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481년으로 볼 때에는(최근 문자왕대인 495년 무렵으로 보는 설이 유력시) 5세기 후반까지. 주둔의 범위도 왕도 외의 지방도 설정(梁山 혹은 東萊 善山으로 추정).

 

. 고구려의 주둔으로 신라 문화의 고구려 영향. 정치 제도와 함께 수많은 문화적인 영향. 예컨대 호우총(壺杅塚)의 호우명문(壺杅銘文),‘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서봉총(瑞鳳塚) 출토 은합우명문(銀合杅銘文, 그릇 뚜껑의 내부와 밑바닥에 延壽元年..., ). 기마전술(騎馬戰術)과 무구(武具) 갑주(甲冑) . 군주(軍主), 당주(幢主) 도사(道使), 성촌(城村) . 이두문.

 

5. 중고기(中古期)

. 신라사의 시기구분. 신라는 지리적으로 한반도 동남우(東南隅)에 치우쳤던 까닭에 국가의 형성, 발전이 가장 늦음. 신라사의 입장에서 삼국시대사를 보면 낙후된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따라 잡아가는 과정.

 

. 6세기 초 지증왕대(500-514)의 정치 변화. 즉위상의 문제와 의문. 502년 순장제 폐지. 우경(牛耕) 장려, 503년 국호 확정과 중국식 왕호, 505년 주제(州制)와 군주제(軍主制) 실시. 영토 확장.

-이를 토대로 법흥왕대(514-540)에 국가체제 정비. 517년 병부(兵部) 설치하여 군사권 집중화 시도, 520년 율령, 528년 불교 공인(공인 연대는 논란), 531년 상대등(上大等) 설치, 532년 금관가야 정복, 연호 사용, 대왕(大王)이라 칭하여 부()를 초월하는 존재.

 

. 진흥왕(540-576)은 이러한 내부체제 정비를 발판으로 영역 확장. 이를 웅변하는 것은 순수비와 단양신라적성비. 한강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최대 판도.

-이를 토대로 왕족의식 고양하여 진종사상(眞種思想), 전륜성왕(轉輪聖王) 자처, 태자책봉제(太子冊封制), 제왕(帝王), 545년의 국사(國史) 편찬. 화랑도(花郞徒) 정비. 진평왕(579-632)은 관제 정비하고 석가족(釋迦族) 표방, 성골이라는 왕족 신분 만듦.

 

. 신라는 발전이 늦었던 반면 상대적으로 족적(族的)인 기반이 강함. 천도를 하지 않음.(보수성, 폐쇄성을 의미) 이는 삼국통합에 성공한 하나의 요인. 그것은 족적인데 바탕한 골품제가 멸망할 때까지 존속한 데에서 알 수가 있음.

 

. 중고기를 거치면서 신라는 착실한 성장. 삼국통합에의 기반 마련. 독자적인 세력화. 진흥왕대 중국과 직접 통교한 것은 문화상, 외교상 큰 의미.

 

*골품제(骨品制)

신라의 국가 형성, 발달 과정에서 지배자집단을 편제하면서 성립한 古代的인 신분제. 고구려, 백제에도 유사한 신분제가 있을 듯.

왕경지배자공동체(王京支配者集團)만을 대상.

초기에는 8계층구조. 통일기 성골(聖骨)  1-3두품(頭品) 탈락. 나말(羅末)까지에는 5계층.

신분 상승은 전혀 불가능. 반면 하강(下降)은 가능. 족강(族降).

거기(車騎), 색복(色服), 옥사(屋舍), 기용(器用) 등 일상생활 규제.

가장 본질적인 성격은 관등, 관직과의 관계. 경위와 외위. 5등관제.

 

 

. 통일신라와 발해(渤海)

. 중세의 시작이냐 고대의 연장이냐?

. 발해의 귀속(歸屬)문제? 한국사냐 중국사의 일부냐? 독립사냐?

. 신라와 발해 지배체제상의 특징과 멸망의 요인은?

 

1. 통일신라시대론(統一新羅時代論)과 남북국시대론(南北國時代論);

. 전자는 일반적인 용어. 후자는 유덕공의 발해고 이후 특히 60년대부터 제기. 남북한 모두 한때 사용하다가 북한에서는 사용 안함. 남한의 일각에서 사용.

-어느 편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후 역사의 전개에 대한 인식은 달라짐. 예컨대 통일신라시대라 하였을 경우 민족통일과 민족문화의 발전에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강조. 기존의 일반적인 견해. 남북국시대라 할 경우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의미는 축소. 발해의 멸망과 고려의 통일이 가지는 의미가 커짐.

 

. 양자에는 모두 문제점이 있음. 엄밀히 말하면 668년부터 698년에 이르기까지는 통일신라시대임은 분명. 그 이후 발해에 대해서도 정통왕조로서의 인정 여부에 대한 문제. 그래서 남북조시대를 사용하기를 꺼려하는 논자들도 많음. 발해의 소홀시 문제는 있음. 신라, 후기신라란 용어 사용하기도 함.

 

2. 통일기중세기점론

. 최근 통일기는 시대구분의 한 기점이 된다는 의미에서도 주목. 종래 고대사의 종점(終點)과 중세사(中世史)의 기점(起點)을 나말려초로 봄이 일반적.

-그런데 사회경제사적인 입장에서 통일기를 고대의 종말(終末)로 보려는 견해가 제기되어 주목. 그럴 때 통일기나 통일전쟁이 가지는 의미가 크게 달라짐. 그 성격에 대한 평가는 새로워져야 함.

 

. 그러나 아직은 중세로 보려는 견해가 문제제기의 수준에 있음. 가령 고대사회의 대표적인 신분제로 인식되어온 골품제와 같은 것은 성격도 크게 달리 이해되어야 함. 인물에 대한 평가도 달라짐.

*예컨대 김춘추와 김유신에 대한 평가.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

 

 

3. 통일전쟁의 기원(起源)과 경과(經過)

1)통일문제에 대한 교훈;

- 통일기에 대한 문제는 오늘날에 중요한 교훈. 특히 통합후의 처리 방향에 대한 인식은 시대는 천년 이상을 격()하고 있지만 시사점.

- 그러므로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어야 할 듯. 의외로 그것이 가지는 비중에 비해서 관심이 저조한 편.

 

2)통일전쟁의 기점론

- 기왕에 통일전쟁의 기점을 6세기 중엽의 진흥왕대까지로 소급하려는 견해가 있지만 이는 잘못. 계속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의미가 없음. 또 하필 진흥왕대로 잡아야 할 이유가 없음. 왜냐하면 그것이 어떻게 전쟁 발발의 계기가 되느냐에 대한 설명을 해낼 수 없기 때문.

 

3)통일전쟁의 경과와 성격

. 통일전쟁 과정을 구체적으로 접근. 642 7월 백제가 40여성 공략. 8월에 다시 당항성 공격. 다급해진 신라는 당()에 사신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 또 백제는 대야성 공격하여 김춘추의 딸과 사위 품석(品釋)을 패사시킴. 이로 말미암아 김춘추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나 실패.

*김춘추의 탈출설화

 

. 643년 가을 당에 사신 파견하여 원병을 다시 요청하니 당 태종(太宗)은 세 가지 계책을 줌. 첫째는 당이 요동을 치는 것, 둘째는 당의 군복과 병기로 속이는 방법, 셋째, 당이 직접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신라가 현재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이므로 당의 왕족을 보내어 다스리는 방식. 신라에게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 세번째 안이지만 주어진 조건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음. 어느 것도 신라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

 

. 사실 당의 관심은 신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공격에 있었음. 이미 641년부터 준비. 640년 고창(高昌)이 멸망.

-이후 남은 세력은 고구려. 641년 진대덕(陳大德)을 사신 파견. 고구려 영역에 들어와 정탐하여 결과 보고서를 낸 것이 󰡔고려기󰡕. 󰡔한원󰡕에 인용. 그래서 신라를 도울 생각은 전혀 없음.

 

. 그런데 당 태종이 한 말은 신라 국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킴. 내분의 조짐.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갈등관계가 표출되는 계기. 게다가 대야성(大耶城)의 책임자는 김춘추의 사위로서 그는 항복.

-그래서 김춘추가 고구려에 원병을 하러 나섬. 644 11월 당은 고구려 원정에 나섬. 이때에 당은 백제와 고구려 병력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상리현장(相里玄獎)을 고구려, 백제, 신라에 파견함. 목적이 각각 다름. 신라는 병력 파견키로 함(3만 또는 5. 그 향방은 알 수 없음).

 

. 당의 고구려 원정의 실패는 신라의 내부 정치에도 영향. 갈등이 표출. 그래서 왕당파(王黨派)의 수세로 귀족파(貴族派)의 대표인 비담(毗曇) 645 11월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무마(당시 女王의 사망 후 상대등이 후임자가 될 가능성이 많았음). 646년 말 김춘추는 도일(渡日). 그 해 9월 고향현리(高向玄里)가 신라에 옴. 김춘추의 도일은 수수께끼. 부정론도 있지만 왜 도일하였는지? (이때 여왕에서 남왕으로 넘어 감).

 

. 김춘추 부재(不在)를 틈타 비담이 반란. 십여일 만에 진압. 김춘추 김유신세력의 시대 도래. 다시 진덕의 즉위. 김춘추의 적극적인 대당 외교. 648년 당으로 감. 당 태종(太宗)에게 나아가 군사 요청하면서 아마도 여왕 즉위 문제 해명. 적극적으로 당제 수용 표명. 이때에 밀약(密約) 성립(백제는 신라가, 고구려는 당이 장악).

 

. 그런데 즉시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님. 이후 10년만에 전쟁이 발발한 것은 649년 태종의 사망이란 변수도 작용하였지만 당 내부의 문제가 큼. 사실 이때부터 측천무후(則天武后)와 태종의 공신(功臣)들과의 대립. 655년 왕후(王后)를 폐()하고 무후를 왕후, 656년 태자를 폐하고 무후의 아들 홍()을 태자로 삼음. 659년 장손무기(長孫無忌) 등을 죽임. 당 내부의 정치적인 변동.

-그렇다면 660년에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게 된 것은 사실 당의 내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

 

. 한편 신라에서도 내부 문제. 659년 진주(眞珠)를 병부령에 임명. 아마도 이 시기 백제전은 신라로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갈등문제를 해결하는 수단.

-이는 김춘추의 즉위가 비상적(非常的)인 방법이었던 데서도 알 수 있거니와 전쟁 중에 군공 세운 유력귀족을 처형. 662년 대당총관(大幢總管) 진주(眞珠)와 남천주총관(南川州總管) 진흠(眞欽),669년 한성주도독(漢城州都督) 박도유(朴都儒), 670년 한성주도독 수세(藪世), 673년 대아찬 대토(大吐) . 여기에 당이 적절하게 개입 이용.

 

. 전쟁은 마침내 당과 신라의 전쟁,676년 신라가 당을 축출하여 통일. 통일전쟁도 문무왕 등 왕권에 반발하는 세력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님.

-문무왕이 681년 사망하면서 종묘사직의 주는 잠시라도 비워둘 수는 없으니 태자는 구전(柩前)에서 즉위하라는 말에서 느껴짐. 신문왕이 즉위하자마자 발발한 김흠돌(金欽突)의 모반 사건은 그를 입증.

 

4. 전후처리방향(戰後處理方向)과 신질서(新秩序)의 수립(樹立)

1)삼국통합정책의 방향

. 처음부터 신라가 민족통일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님. 흔히 통일 운운(云云)하지만 신라는 백제에 대한 위기 탈출 목적, 결국은 백제 제압이 목표. 당은 일차적으로 관심을 고구려에 가졌으나 한반도 장악에 궁극적 목적.

-통일 이후 고구려, 백제의 민을 포괄하는 민족융합정책을 실시. 적어도 외형상 차별 없는 균등한 정책 시도.

 

. 문무왕의 유조(遺詔)에서 통일정책의 대강을 짐작.

“...전쟁에서 산자와 죽은자를 추상(追賞)하여 중외(中外)에 소작(疎爵)을 골고루 주었고 병기를 녹이어 농구를 삼아 백성을 인수(仁壽)의 땅에 처하게 하였다. 부세(賦稅)를 가볍게 하고 요역(徭役)을 줄이니 집안이 넉넉하고 인구가 늘며 민간이 안정하여 나라 안에 우환이 없었다. 창름(倉廩)은 구산(丘山)과 같이 쌓여 있고 감옥은 무성한 풀밭을 이루었으니... 변성(邊城) 진알(鎭謁) 및 주현(州縣)의 과제는 필요한 것이 아니거든 모두 헤아려 폐하고 율령과 격식에 불편함이 있는 것은 곧 고치도록 원근에 이 뜻을 포고하여 알리고 주사자(主司者)는 시행하라”. 공정한 경제문제와 새로운 율령 시행.

 

. 전쟁을 마무리한 것은 문무왕이지만 전체적인 뒤처리와 함께 체제정비는 신문왕(神文王)대에 행해짐. 9서당(誓幢), 9() 5소경제(小京制). 도량형의 통일(경제정책), 동등한 세금 부과.

-고구려 백제민 포섭책으로 본국에서의 것을 기준으로 관등 관직 지급함. 아마도 신문왕 2(682) 국학(國學)의 수용도 통일정책의 일환.

-그러면서 일통삼한의식(一統三韓意識)을 강조(청주 운천동 사적비. 통일 이데올로기. 이는 의도적으로 강조). 보덕왕 안승(安勝)을 진골귀족으로 편입시키고 결혼, 왕도에 살게 함. 경흥이란 승려를 국사(國師)로 채용하도록 함. 9

-주와 군()에는 각각 주통(州統) 9인과 군통(郡統) 18인 파견. 이는 불교(佛敎)의 기능을 보여 줌. 통일 후 삼국통합정책에 크게 기여한 것은 바로 불교란 바탕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 삼국통합 후 당연히 겪었을 사상적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불교. 불교가 그래서 통일 이후 크게 발전. 특히 화엄종 강조.(그것이 전제왕권과의 관련 여부문제를 떠나서).

-새로운 사전조직(祀典組織). 달구벌(達句伐)로의 천도. 이 천도는 계획적인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미과(未果). 오악(五岳) 가운데 중심인 중악(中岳)이 팔공산(八公山)인 것은 그를 보여 줌.

 

2)김흠돌(金欽突)의 난()과 체제정비(體制整備)

. 통일 후의 체제 정비과정은 자연 국왕권의 강화를 가져옴. 전쟁에 대한 포상은 국왕을 중심으로 함. 경제적인 낙차. 예컨대 고구려 멸망 후 행해진 군공포상에서 목마장(牧馬場) 174개소를 분배. 왕실에 22, () 10, 김유신6, 김인문5 그밖에 각간 7인에게 각 3개 이찬 5인에게 각 2개 이하 각 1개씩 차등 지급. 아마도 군공에 대한 포상은 큰 차이.

-이외에도 통일 이후 식읍도 큰 차이. 그에 따른 불만층은 존재. 특히 기존 귀족파의 불만. 이러한 경제적인 배경도 곧 국왕권 지지 세력에게 자연히 집중되었을 듯하기 때문.

 

. 그 결과 귀족들의 반발. 이미 문무왕대에 예견. 681년 김흠돌의 모반사건. 신문왕의 장인인 흠돌이 통일전쟁의 처리과정에서 소외된 세력에 대한 대변. 귀족파가 왕권파에 대한 최후의 도전. 아마도 이는 중고기 이래 지속되어 온 귀족파와 왕권파와의 갈등을 마무리 지운 대단원.

-김흠돌의 난을 사전에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죄목을 쒸워 병부령 김군관(金軍官)을 적자(嫡子)1인과 함꼐 주살(誅殺). 사소한 일로 공신을 처리한 것은 당시 신문왕의 강한 의지 반영. 김흠돌의 난은 3,4일에 그쳤지만 난 진압 후 신문왕이 내린 교서에서 山谷으로 도망간 잔당까지 샅샅이 찾아 죽였다고 함. 귀족들의 반발은 요인은 국왕 중심의 지배체제 강화에 대한 반발. 통일전쟁의 몫이 국왕 중심으로 몰리는 데에 대한 반발.

 

. 난 후 국왕 중심의 체제 정리. 통일전쟁의 처리와 맞물림. 681년 시위부(侍衛府) 격상 조치. 위화부 등 정비. 6()조직의 정비와 5등관제의 시행. 지방제도인 9 5소경제도의 완성. 9서당의 정비.

-관료들에 대한 경제적인 기반 마련을 위하여 687년 문무관료전(文武官僚田) 지급. 689년에는 녹읍제(祿邑制)를 혁파하고 녹봉제(祿俸制) 실시

*후일 녹읍이 부활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 제도의 철저성에 대해서는 의문. 특히 왕족들의 구녹읍(舊祿邑)까지 혁파하지는 않았을 듯. 오히려 그들 중심의 경제적인 혜택. 35금입택(金入宅)의 존재. 따라서 신흥의 귀족들에 대한 국가 예속도 강화가 주된 목적. 그래서 녹읍의 혁파란 귀족들의 경제적인 기반의 더 이상 확산을 막는 것이지 기왕의 것을 박탈한다는 것은 아닐 듯. 재해석 필요.

 

. 관료들의 귀족적인 성격을 최소화하려 함. 이러한 여세를 몰아 달구벌로의 천도 시도, 실패.

*이에 대한 해석 문제는 새롭게 해볼 필요. 이를 갖고 신문왕대 왕권의 한계를 지적하나 그보다는 왕권 지지파조차도 기득권 유지 희망. 오히려 반대한 것 은 바로 이들. 외침 정변 등에 의하지 않는 천도의 어려움을 반영).

 

3)만파식적(萬波息笛)과 신질서(新秩序)

. 신문왕대는 새로운 체제. 그를 반영하는 것이 만파식적. 신라 중고기에는 이른바 삼보(三寶)가 왕권, 지배체제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에 대신하여(中古的 질서를 否定하고) 신문왕대, 중대의 전성을 상징하는 것이 만파식적.

 

. 국왕권은 흑옥대(黑玉帶)가 상징.

 

5. 중대적(中代的) 지배체제의 특징과 모순(矛盾)

1)전제왕권론(專制王權論)의 문제

. 최근 중대에 대한 논란 가운데 하나는 전제왕권론. 종래 중대적인 체제가 소위 전제왕권이며 이 시대를 전제왕권의 시대로 불러온 데에 대한 반론.

-전제왕권이란 용어가 가진 개념에 대한 문제가 내포. 기존의 견해는 하나의 단계로서 절대적인 개념으로 사용. 새로운 견해는 상대적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안정된 시대라는 의미에서 사용.

 

. 중대에는 국왕권의 위상(位相)이 그 전후(前後)에 비해 법적, 제도적으로 국왕에 권력이 집중되어 지배체제가 안정을 이루었다는 의미에서 전제왕권이란 개념을 한정적으로 사용한다면 타당.

 

2)중대적 지배체제의 특징

. 그것은 여하튼 국왕 중심으로 권력이 집권화된 시기였던 것만은 분명(軍制의 집중화를 위한 9서당, 국왕의 아래에 집권할 수 있는 관부 설치 안함, 중앙관부의 장관직 복수제 시행 등은 권력 분산책). 모두 인정.

 

. 그런데 특징은 국왕과 가까운 세력에 편향적으로 집중. 물론 통일기초에는 근친 왕족 뿐만 아니라 통일전쟁의 공신, 특히 김유신계 등이 연합. 점차 이들에 대한 배체. 성덕왕대에 종실척리(宗室戚里)들이 김유신의 손자인 윤중을 중용하는 데에 대해 항의하는 이야기. 고구려계나 백제계는 말할 것도 없고 김유신등 공신계도 도태. 왕족 그 가운데 왕자 중심의 지배체제 운영.

 

. 중대는 국왕을 정점으로 좁은 의미의 왕족 정치 참여. 그를 dbf령으로 보장해 주는 것이 특징. 중고기는 회의체 중심의 정국운영. 귀족간의 합의제적 운영.

 

3)중대적 지배체제의 모순

. 왕자 중심의 지배체제는 이미 무열왕의 즉위 이후 보이기 시작. 즉위하자마자 그의 첫 아들 법민(法敏)을 병부령으로 삼음. 이후 무열왕에게는 다수의 아들이 정치 참여. 적자 5명 서자 3. 이들에게 일시에 관등 지급하여 각자에 역할을 맡김.

*중고기에는 왕제들을 갈문왕으로 책봉하는 것과 판이. 이는 사실상 형식적인 성격을 띰) 또 이들이 공신. 법민, 김인문 등은 대표적. 그리고 딸도 다수. 이들의 자손들이 신문왕을 거치면서 많이 출현. 이들 중심으로 왕족의식이 강화(왕족의식은 이미 진평왕대부터 강화).

 

. 아마도 전례 없는 왕족 중심의 체제 구축. 󰡔당서󰡕의 사례는 그것을 알게 하는 기사가 보임.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

- ‘그 관()을 세우는 데에는 친속(親屬)을 상()으로 하고 그 족()을 제일골(第一骨), 제이골(第二骨)이라 이름 하는데 스스로 구별된다. 형제의 딸 이종자매 모두 처로 삼으며 왕족은 제1, 처는 역시 그 족()이며 아들을 낳으면 제1골이 되고 제2골의 딸을 ()하지 않는다. ()에는 재상(宰相) 시중(侍中) 사농경(司農卿), 태부령(太府令)이 있고 무릇 17관등이 있는데 제2골이 그를 할 수 있다’.

 

. 과거 이 기사의 의미에 대해서는 해석이 잘 안되는 것으로 생각. 이는 이미 골족(骨族)이 분화되고 있음을 보여 줌. 왕족과 여타의 귀족 간의 분화. 왕족은 극심한 근친혼(족내혼). 이것이 오히려 중대 왕조가 안정된 듯이 보이면서도 모순. 왕족 중심의 권력집중화 현상. 그에 대한 반발 세력이 자연히 나오기 마련.

 

. 왕족 중심의 지배체제 안정을 도모하여 태자책봉제(太子冊封制)의 정착. 무열왕의 직계 조상에 대한 존숭(尊崇)의 관념 강화, 중국식 오묘제(五廟制) 채택.

-경덕왕대에 왕자가 없자 그를 얻기 위한 줄기찬 노력(*표훈대덕 이야기). 무자(無子)일 경우 왕비를 축출한 사례도 있음. 무열왕 직계비속의 계승. 이는 왕족의식의 고조를 반영. 이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 율령. 따라서 율령적인 지배체제 강화.

-유교적인 왕권 강화가 중고와의 큰 차이점. 중고는 불교적인 분식, 전륜성왕사상, 석가모니 신성가족. 왕즉불 의식. 그러나 중고에는 현실적인 충()과 효() 강조. 신자(臣子)의 도리 강조. 율령이 그를 밑받침.

 

. 왕자, 왕족 중심의 배타적인 체제는 내부의 문제를 낳게 됨. 그들 가운데에서도 외척(外戚)이 되기 위한 다툼. 그래서 중대에는 상당한 근친혼(近親婚, 族內婚으로 표현). 왕족간의 또 귀족간의 갈등을 야기.

-중대에 8명의 왕. 중대적인 지배체제가 성립한 신문 이후 혜공왕에 이르기까지 6명의 왕, 이 가운데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가 일찍 사망하여 혼인한 사례를 남기지 않은 효소왕(孝昭王)을 제외하고는 모두 2인의 부인. 그것도 거의 모두 전비(前妃)는 축출(逐出). 이는 끊임없이 귀족들 간에는 왕비 배출을 위한 알력이 계속되었음을 보여 줌.

 

. 결국 경덕왕대에 시행한 한화정책(漢化政策)이 빌미가 되어 그들 간의 결집. 왕족 중심의 지배체제에 반감을 가져왔던 귀족들, 서로 간의 갈등에서 배제된 여타 근친 왕족들이 경덕왕의 한화정책에 반발. 경덕왕은 그를 관철하고 나아가 혜공왕을 즉위시키기 위하여 녹읍의 부활과 같은 정책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양보.

 

. 그러나 그가 사망한 후 혜공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계속하여 반란이 발발. 혜공왕(惠恭王, 4, 768) 이른바 96각간의 난으로도 불리는 대공(大恭)과 대렴(大廉) 형제의 난 이후 780년에 이르기까지 6차례. 이들 난의 성격을 둘러싸고 논란.

-그러나 특징은 왕위를 내몰지 않았던 것임. 왕위계승을 목표로 한 반란이 아니었다는 데에 특징. 단순한 권력 투쟁. 그 점이 다음에 도래하는 뚜렷한 하대와는 차이점. 이는 국왕 중심의 지배체제, 무열왕계의 체제가 갖추어졌음을 의미. 하대(下代) 사회가 성립되었어도 즉시 무열왕과 문무왕을 5묘제에서 제외시키지 않았거나, 선덕왕의 사망이후 김주원을 제1의 계승권자로 내세우고 있었던 것도 그를 반영. 결국 이들 난은 흔들리는 지배체제를 틈탄 귀족간의 권력투쟁이었음을 의미. 그러나 난의 와중에 결국에는 혜공왕이 피살됨으로써 중대는 종막을 고함.

 

. 요컨대 이로 보면 중대는 왕족 중심, 왕자 중심의 지배체제 구축. 지배집단의 규모가 현저히 축소. 이들 가운데 왕비의 자리 다툼.

-중대가 겉으로는 안정되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여러 차례 반란. 그럼에도 안정적이었던 것은 제도적인 정비 덕분. 률령정치 발달을 의미. 왕권 자체는 안정 구가.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그를 한 마디로 어떻게 표현하건 전후의 다른 시기와는 구별되어도 좋다고 보임. 중대를 시종일관 전제왕권파와 귀족파의 대립으로 파악하려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문제. 중대적인 지배체제는 그 전과는 다름. 일단 반왕파적인 존재는 신문왕대에 척결.

 

6. 통일기의 신라 외교(外交);기존의 통설적인 이해에 약간의 의문점 때문

1)당과의 관계

. 통일전쟁의 최후 마무리는 당과의 싸움. 675년 매초성(買肖城) 싸움, 676년 기벌포(伎伐浦)의 싸움으로 마무리됨. 이후 당과는 한동안 냉랭한 관계.

-그러나 그런 관계가 그렇게 오래 지속된 것 같지는 않았던 듯. 흔히 성덕왕대에 가서야 735년 패강(浿江) 이남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비로소 당과의 평화적인 관계가 회복되는 듯 설명하고 있는 데 그렇지 않음.

 

. 당은 패배 이후 신라에 대한 야욕을 사실상 포기하고 오히려 백제, 고구려 유민을 이용하여 견제하려 함. 문무왕이 681년 사망하고 신문왕이 즉위하였을 때 사신을 보내어 부()의 관작(官爵)을 그대로 인정해 줌. 신문왕 6년에는 사신을 보내어 예기(禮記)와 문장(文章)을 요구하니 측천무후가 이에 응하는 조치를 취함. 그로 보면 결코 대립적인 관계는 아님.

 

. 그처럼 신라와 당의 관계가 예상보다 일찍 회복된 것은 아마도 당 내부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지만 다른 한편 오랫동안 대당(對唐) 창구(窓口)의 노릇을 해온 김인문(金仁問)의 공로 또한 무시해서는 안될 듯. 이미 무열왕은 그 측근들을 통하여 대당 창구 장악. 그 셋째 아들인 문왕을 숙위시킴.

-그래서 당의 동향을 보고. 결국 신라의 통합은 외교적인 승리. 오랫동안 그 창구 역할을 해왔던 것이 김인문. 그는 김춘추의 제 2자로 651 23세에 당에 숙위한 이후 7차례 22년 동안 당나라에서 보내었다가 694 66세로 당에서 사망. 김유신과 함께 선봉으로서 통일전쟁의 공로. 당의 동향을 알려주는 역할(의상이 귀국시). 674년 신라 문무왕이 당과 대항하려 할 때에 문무왕을 대신하여 당에서는 그를 신라왕으로 삼았으나 거절한 적이 있을 정도로 신임. 고구려 멸망 후 포상할 때 신라에서는 식읍 500를 지급하였으나 작위를 올릴 뿐만 아니라 식읍을 3,000호 지급. 이는 당이 인문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 지를 보여 줌. 인문은 당에 남아 창구 역할. 아마도 신라와 당의 관계가 일찍 회복된 데에는 그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을 듯. 그의 사망 후 귀국하여 대접 받는 것도 그 공을 인정.

 

2)일본과의 관계

. 통일 이후 일본과는 특이한 관계. 통일 이후 7세기 중엽까지 대립관계가 지속이 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잘못.

-일본이 663년 백제에 대한 원병을 파견하였다가 백강(白江)전투에서 거의 전멸되다시피 함. 이것이 이후 일본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치거니와 이후 일본에서는 신라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책 마련. 그래서 각지에 조선식 산성을 구축(이 산성은 사실상 백제식).

 

. 그러는 한편 전례 없이 빈번하게 사신 파견. 신라에서도 일본에 사신 파견. 서로 간에 침공하지 않을까 정탐을 함. 실제로 웅진도독부에서 신라의 일본 공격을 퍼트림. 따라서 양국관계는 긴장관계. 그러면서도 빈번하게 사절을 파견하는 이상한 관계.

-日本이란 국호 사용을 알 수 있는 것도 670년에 일본이 신라에 보낸 사절에 의해서임. 신라에서도 그에 대한 대비. 이는 문무왕이 죽어서 동해(東海)의 용왕(龍王)이 되겠다는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음.

 

. 신라에서는 성덕왕 21(722) 모벌군(毛伐郡)에 관문성(關門城) 축조. 그 후 신라에 왔던 일본 사신이 이에 항의하는 사건이 있었음.

-한편 일본에서도 󰡔일본서기󰡕(720) 󰡔고사기󰡕(712)에서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을 강조. 과연 성덕왕 30(731) 병선(兵船) 3백 척이 동해안에 나타나 신라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대패하는 사건. 이후 신라와 일본은 교류 관계가 현저히 줄어들어 감.

-특히 경덕왕대에는 2차례에 걸쳐 일본 사신 접견을 금지. 이후 긴장관계가 지속되면서 파견 회수도 줄어 들어가다가 장보고의 청해진이 만들어진 전후에는 공적인 관계는 거의 단절되어 감.

 

3)발해(渤海)와의 관계

. 발해와의 관계를 거의 대립적인 것으로 설명. 신라가 북국(北國)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그런 관계의 표현. 물론 당과 일본을 둘러싸고 외교관계에서 대립.

- 특히 당에서 쟁장(爭長)사건, 빈공과(賓貢科) 수석 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시종일관 대립되어 왔던 것은 아님.

 

. 󰡔삼국사기󰡕 37 지리지4의 말미에 가탐(賈耽)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를 인용한 부분 가운데自新羅泉井郡至柵城府 凡三十九驛이란 귀절. 이는 교역로의 존재를 의미. 따라서 일정한 교역,교류관계도 존재. 따라서 기존의 인식은 수정.

 

7.하대(下代)의 성과 동요(動搖)

1)하대의 특징

. 하대는 김양상(金良相)과 김경신(金敬信)이 주도로 성립. 김양상이 즉위하여 선덕왕(宣德王)이 됨. 하대가 열리게 되었더라도 여전히 중대가 지녔던 모순구조는 해소되지 않은 채 여러 유력 귀족세력이 여기에 연합하여 창출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귀족들이 할거(割據)하는 형태. 그래서 이를 한마디로 귀족연립(貴族聯立)의 시대라고 부른다.

 

. 다만 흔히 하대에는 중고의 정치체제로의 복귀(復歸)를 지배층 스스로 희망한 것으로 설명. 그러나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 왕권 자체의 지향은 중대적이었다. 국왕을 정점으로 한 지향성을 가짐.

 

. 선덕왕 사후 아들이 없어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김경신과 김주원(金周元)이 대립. 귀족회의에서 후자를 옹립(*김주원을 추대한 것은 여전히 중대적인 인식이 지속되고 있었음을 반영). 그러나 김양상의 측근인 김경신이 힘에 의해 즉위하여 원성왕(元聖王).

-사실 하대는 이후 그의 직계가 계승한 시대. 하대 왕계의 실질적인 시조. 그의 직계 중심의 오묘제 시행. 관료의 양성을 위하여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설치(788).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태자책봉제를 시행하였으나 인겸(仁謙)과 의영(義英)이 조사(早死)하여 손자가 왕위 계승(昭聖王).

 

. 그러나 소성왕은 재위 2년만에 죽고 그의 아들 청명(淸明)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애장왕(哀莊王, 800-808). 이로 말미암아 그의 세 숙부가 연합하여 정치. 언승(彦承), 수종(秀宗), 충공(忠恭). 애장왕대의 몇몇 개혁적인 시도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짐. 특이할 것은 이때에 이르러 완전히 원성왕의 직계로 오묘제를 바꿈. 태종과 문무왕은 별립.

-하대적인 질서의 확립을 위하여 공식(公式) 20여조 반포, 불사(佛寺) 창건 행위 금지, 군읍(郡邑)의 강역분정(疆域分定). 그러다가 언승 등에 의해 애장왕 살해. 언승이 즉위하여 헌덕왕. 요컨대 하대는 귀족이 연립, 원성왕의 직계가 왕위계승.

 

2)김헌창(金憲昌)의 난과 그 영향

. 헌덕왕 즉위 후 여러 해에 걸쳐 수해나 한해가 나는 등 경제적인 불안정, 농민 봉기, 농민들은 당과 일본으로 가는 사례 빈발. 그러한 기회에 정치적으로는 헌덕왕 3인 형제가 오로지.

 

. 김헌창은 그의 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데에 대한 불만으로 822년 웅천주를 거점으로 반란. 이들에 가담한 지역은 대부분 그가 지방장관을 역임. 사실상은 헌덕왕(언승) 3형제 중심의 인사에 대한 불만. 김헌창은 시중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지방장관 역임.

 

. 이 난은 특히 국호(國號, 長安)과 연호(慶雲)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주목. 그 이전의 어느 반란과도 성격을 달리함. 사실상 신라적인 체제 부정이었던 셈.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은 당을 인식.

-이후 후삼국과 연결될 수 있는 바탕. 지방세력의 자립화 촉진. 난에 참여한 범위의 광범위성이나 혹은 종족당여(宗族黨與) 239인이나 주살되었다는 것에서 그 규모를 짐작. 사실상 후삼국의 정립은 여기에서 예고되고 있었음. 난의 범위는 후일 반()신라를 기치로 한 대부분의 지역을 포괄.

-이 난 후에 시행된 834(흥덕왕 7) 골품제 개혁에서 일부 수용하였으나 형식적. 사실상 이로써 지방세력의 자립화의 길을 염. 지방민에 대한 우대책 마련. 촌주에 대한 우대책으로 5두품 대우, 사찬중위제 채택. 그러나 형식적. 이미 스스로 골품제 부정. 녹진(祿眞)에 대해 대아찬 지급.

 

3)장보고(張保皐)의 해상활동(海上活動)과 하대의 동요;

. 이미 김헌창의 난에서 예고되었듯이 반자립적인 세력이 지방에서 출현.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장보고세력.

-장보고는 특이한 인물. 중국, 일본, 한국의 3국 사서에 올라 있는 인물. 이는 그가 가지는 위치를 반영. 그가 건설한 해상왕국(海上王國)을 상업제국(商業帝國), 장보고를 상인군주(商人君主)로 보려는 견해도 있음.

 

. 청해진을 발판으로 중국, 신라, 일본의 해상활동 장악. 당에서는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 법화원. 중국에서 귀국한 후 신라에 1만병 요청하여 승인 받음. 아마도 이는 중앙의 힘이 당시 거의 미치지 못하고 있던 무진주를 비롯한 지역의 관할권 이양.

-중앙정부도 그를 통해 사치품 수입. 그를 발판으로 중앙정부에 개입. 흥덕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한 후 왕족 간의 대립. 신무왕(神武王)의 즉위에 간여. 힘에 의해 그를 즉위시킴. 결국 그의 딸을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의 . 실패하여 반란.

-자객으로 그의 밑에 있었던 무진주 출신의 염장(閻長)에 의해 살해. 얼마 뒤 그곳은 병력은 벽골군으로 옮겨짐. 해상무역의 중심지는 황해 중부 지역으로 이동됨.

 

. 사실 장보고의 의 왕비 시도, 염장에 대한 아찬 지급 등에서 이미 스스로 골품제가 부정되고 있었음을 보여 줌. 이후 9세기 후반 진성여왕대에 가서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기까지 아직 체제는 유지하지만 사실상 명목만 존재할 따름.

*장보고의 출신지는 완도로 추정. 원명은 궁복(弓福)인데 궁에서 장(), ()이 보고(保皐). 도당(渡唐)의 게기는 810년대의 기근.自活의 필요성. 당시 산동지역에는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李正己) 일가(一家)가 장악. 819년 당군에 토벌되는데 장보고는 그에 군공.이후 병력 축소, 노예매매에 신라인 다수 목도. 귀국. 828년 청해진 설치. 대사(大使)라는 특수한 직함을 가짐. 사실 이정기일가의 장악 지역은 장보고의 관할하에 들어옴. 삼각무역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여 당의 황해연안지역 교역권 장악. 등주(登州)의 적산포(赤山浦)가 당내의 거점. 적산법화원(赤山法花院)이란 사찰 건립. 이 지역에 아라비아 등 서역상인. 신라 자체가 국제적인 성격.

 

. 장보고 사후 중앙정치는 일견 안정을 되찾는 듯하였으나 왕위계승전의 여파로 몰락의 길로 치닫고 있었음. 지방에서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는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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